이 질문에 답하려 3년을 준비했습니다 |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저자 전원희 목사님 인터뷰

#신학 #묵상 #애가 #구약 #사순절
◼︎ 영상에서 소개한 책
전원희,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지우
aladin.kr/p/vQM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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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ікірлер: 13

  • @theologytoday
    @theologytoday4 ай бұрын

    ◼︎ 영상에서 소개한 책 전원희,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고", 지우 aladin.kr/p/vQMHa 🔅오신공 멤버십 가입하기 • 신학교 수준의 최신 신학 강의 무제한 시청 url.kr/d9nxcg 🔅 오신공 사역 후원하기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신한은행 장민혁 110-233-786287

  • @dwoo1025
    @dwoo10254 ай бұрын

    말씀 묵상에 연구와 분석은 필요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자의적인 해석이 있을까봐 깊게 하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염려를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정말 성경을 공부한 전문가 분들이 많이 해 주셔야 할 일이네요.

  • @user-lt1md6ts5t
    @user-lt1md6ts5t4 ай бұрын

    그래서 현대신학의 발전이 더욱 있어야 함. 평신도들도 성경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서적들과 자료들이 많음. 그런데 평신도들에게 신학을 너무 어렵게 만든 전문신학이 문제임. 신학자들이 더 연구해 성경을 더 알아 가게끔 노력해야 함. 욕심내지 않고 책 한권에서 한 줄기 내용만이라도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 같음. 백석대총장께선 신학을 비판하며 신앙에 도움 않된다며 라디오방송에 설교하던데 진짜 놀랐음. 오신공같은 콘텐츠가 너무 귀하게 느낌.

  • @seung5016
    @seung50164 ай бұрын

    이 책이 재의 수요일 전에 도착하길 바랐는데, 딱 화요일에 도착해서 어제부터 묵상하고 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잘 묵상하겠습니다.

  • @user-ps7bv5hk7s
    @user-ps7bv5hk7s4 ай бұрын

    오신공 늘 보는데 오늘 예레미야 애가 5장까지 읽어보려 맘 목게 되네요. 애가 끝나지 않음에 감사하며

  • @beshuah99
    @beshuah994 ай бұрын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성령의 열매 희락/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게 중요할 듯해요. 하나님을 끊임없이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분의 뜻과 상관 없이 신학을 위한 신학, 자신을 위한 위한 신학을 하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데는 누구도 예외가 없으니까요.

  • @robertyasushi795
    @robertyasushi7952 ай бұрын

    올바른 신학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서를 깨닫고, 설교를 준비하는 필수 도구 이지요.

  • @SooKyoung1205
    @SooKyoung12054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

  • @user-is1ve3jz9x
    @user-is1ve3jz9x4 ай бұрын

    간과한것이 있어요ㆍ 심층적인 해석은 누적된 체험과 같이합니다 ㆍ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종부리듯 할수있습니다ㆍ 젊은이의 약점인대 고난이라는 반대되는 상황에서 자아와 지체를 알고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겁니다ㆍ 에쨌든지 혁파자세가 둗보입니다ㆍ❤

  • @user-st2ry9kt7t
    @user-st2ry9kt7t4 ай бұрын

    쓸모 없다는 표현은 성급한 일반화죠. 어떤 의미 또는 그 취지로 말씀하신 줄은 이해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때는 마땅히 해당 논지에 대해 부연하고 보완하는 설명들이 필요하겠죠.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내용의 특징은 여러 분류가 있겠지만, 크게 성문학과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주제로 뜨겁게 배우는 것이 전자면 후자는 인본주의적 철학요소가 그 근간이 될 수 있죠. 진화론자에게 성경의 내용을 보여주면 굉장히 불쾌해하죠. 무슨 일일까요? 신념이 정해진 자에게 자신의 강한 신념을 방해하는 정보는 자신이 타인으로 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마련인데요. 성경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보완해주고 업그레이드 해줄 신학적 요소이지만, 다른 이들이 볼때는 그저 종교적 학문적 대상일 때가 다수죠. 신학을 꼭 해야 제대로 믿고 천국가고 성화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시대적 요구 문화적 차이를 세상과 연결하는 접점을 이끌어내고 현실적 대안을 설정하는 중요한 도구로서의 기능도 있습니다. 물하나 떠놓고 하나님께 성경조차 모르고 예배하는 이의 신앙은 무지하고 천박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반대로 고상한 신학자가 그랬다면 거룩한가요? 신학은 다른 관점의 범주입니다.

  • @user-zh5hl8yd9f

    @user-zh5hl8yd9f

    4 ай бұрын

    물 한 그릇 떠놓고 예배한다고 하셨는데, 그 대상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조상이 그냥 섬기던 막연한 '신'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 @user-st2ry9kt7t

    @user-st2ry9kt7t

    4 ай бұрын

    @@user-zh5hl8yd9f 이야기의 이해를 잘못하시고 틀어버리신듯 한데요. 저는 실제 있었던 비유를 말했습니다. 중국에서 1990년대 말에 우리 선교사님들께서 한 지역을 방문 중일때,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 아들이 구원해준 사실을 믿고 예배를 드리려는데, 종교적 탄압적 이유로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부모는 돌아가시고 그 자녀들만 남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몰라서 주변 무속신앙인이 그릇에 죽주(대나무술-마오타이유사종)를 떠서 빌고 있는 모습보고 그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고 선교 보고회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럼 분면한 것은 신은 전해들었고 그신이 어떤 정도인지는 인지하겠죠. 물론 더 나가서 신의 이름도 까먹고 아들이 예수인지도 모르면 뭐 그리 말씀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상황을 가정해서 이야기헀을리가 없는 제 문맥적 설명이었습니다. 설령, 그들이 신을 모르고 물 떠 놨으면 그 신이 누구이건 그걸 신앙이라할 사람은 없죠. 신앙 그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대상입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자신이 믿음을 가지느냐죠. 모세도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방금 나와 대화하신 분 정도로 이야기 하겠죠. 그게 틀린 의미는 아니겠지만, 이름을 떠나 참된 대상이냐 아니냐를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이름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대상에 모든 것을 지식적으로 인지할 수도 없겠지만, 이름을 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누구에게 예배하며 누구를 경외할찌 기초적 단서를 제공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름만 아는 상황에 형식을 모르는 예배자가 등장했다면 충분이 먼저 말한 질문과 같이 막연함이 있다해도 이름만으로도 그 충분한 인지적 방향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에서 하느님, 라틴어에서 디오스, 히브리어에서 야훼, 그 이전 아카드 수메르 아람 공통으로 엘로힘, 뭐 너무 다양하죠. 이런 다른 이름을 불러도 우리가 그 대상이 다르다 하지 않고 특히 당신이 하나님의 입장에 계시다면, 당신은 이름이 틀렸으니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성경적 지식과 교리 풍성하년 깊이 있는 영적 삶과 행동들이 생겨나겠죠. 제가 말하고 싶은 본래의 의미와 주제는 신이라면 이름이 다르다 해서 그 사람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 불렀구만 하며 뒷걸음칠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왜 야훼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실 수 있지만 먼저 말하지 않고 모세로부터 거꾸로 질문 받고 알려 주실까요? 저는 여기에 핵심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를 알기위해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고 성경적 주제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오 사마라이의 우물 곁에 그 여인이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는 정보로 메시야를 꺼냅니다. 내가 그로라. 네,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신인지 모르는 정지시점과 나의 지식 상태 현재가 논란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관점에서 앞으로의 계획속에서 이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이끌어나갈지, 구원의 자녀로 삼을찌, 이미 예정된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겁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그런 주제죠. 부자가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아브라함도 알고 부유했으니 때마다 예루살렘에 제사를 드리고 서기관들에게 성서도 많이 읽혀 들었을테고요. 할수 있는 것이 많았겠죠. 문앞에 엎드린 거지 나사로라는 이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이름, 형식, 풍성한 성경지식과 교리?, 아! 핵심적 구원의 말씀? 사영리 같은 것과 영접기도? 생각해보세요. 그런 것들이 모두 시간이 정지한 극한의 정점에서 어느 요소 하나 때문에 신앙적 삶의 평가를 우리가 내려 진단할 수 있는지를요.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인간이 신에게 성서적 지식과 풍성한 예배를 통해 내가 훌룽히 평가 받고 있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어떤 이는 주어진 환경을 분모 A로 하고 해낸 신앙의 성과 그 일을 N이라고 하면 신앙의 평가는 N/A 입니다. 솔로몬이 해낸 그 많은 풍성함은 하나님의 질책을 받았고, 과부의 두 랩돈은 전부로 평가 받았죠. 성경적 지식과 교리문제도, 구원의 도와 대상만 인지할 경우 그런 것들의 질적 양적 차이가 과연 신에게 있어서 어떻게 평가될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취지는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깊은 의미입니다. 강의를 다 하자면 4시간이고 A4 용지 11폰트 통상 간격으로 하면 대략 30페이지 분량의 내용들이죠. 신의 판단을 마치 내가 하고 있는듯 지식과 교리의 논쟁에 빠져 오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훌륭한 선배들의 좋은 성서적 깨달음의 유무와 질적 차이가 중요한게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란 것입니다.

  • @user-zh5hl8yd9f
    @user-zh5hl8yd9f4 ай бұрын

    신학이 잘못된 걸까요, 교회가 잘못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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