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4주일 나해 / 2024년 7월 7일 /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 대전 노은동 성당 / 매일 강론

연중 제 14주일 나해 / 2024년 7월 7일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 대전 노은동 성당 / 매일 강론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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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2,2-5; 2코린 12,7ㄴ-10; 마르 6,1-6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장마가 시작되어 습한 날씨와,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치열한 한 주 지내시느라, 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미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행사가 있어서 교구청에 간 일이 있는데, 어떤 자매님이 제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바자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가 어떤 바자회를 도와드렸지요?” “어머, 신부님, 성모병원에 계신 강전용 신부님 아니세요?” “아, 아닙니다. 저는 신학교에 있는 김유정 신부라고 합니다.”
일 년 뒤 같은 날, 교구청에서 그 자매님을 또 만났습니다. 제게 반갑게 인사하시더니 이러시더라구요. “신부님, 작년에 제가 신부님인 줄 알고 다른 신부님한테 실수를 했지 뭐예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걘데요...”
우리는 크고 작은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내가 착각했었구나’하고 인정하면 괜찮은데, 인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새신부 때에 보좌신부로 있던 본당을 십수 년 만에 방문했는데, 성당 복도에서 한 자매님과 마주쳤습니다. 그분이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어? 오늘 김유정 신부님 특강하신다던데….” 그래서 “예. 전데요.” 그랬더니 “아닌데?” 하시길래 “제가 김유정 신부입니다.” 그랬더니 “아니예요!” 하고는 가버리셨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호수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12년간 하혈하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죽은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경탄하며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신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섯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저 사람이 얻은 특별한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는, 앞에 나온 특별한 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속성에 해당합니다. 셋째,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기적의 원천은 하느님이셔야 하는데, 왜 저 사람 손에서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넷째,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는 정규 랍비 수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노동자가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다섯째,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촌 형제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의 질문들을 종합해 보면 이러합니다. ‘그는 우리가 예측하는 범위 내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벗어났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의 기적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십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과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등 이방인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워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향 사람들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믿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장점이 될 수 있던 것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바로 편견이었습니다.
버나드 로너건이라는 캐나다 신학자가 계신데요, 이분은 인류 역사 안에 출연한 악을 편견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개인적 편견입니다. 개인적 편견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사회적 상황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으로, 이기주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회와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둘째, 집단적 편견입니다. 이는 선을 도모하는 데에서 사회의 특정 집단이나 부류가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이에 해당하며, 집단적 편견을 부추기는 세력이 득세할 때, 사회는 무척 위험해집니다.
셋째는 일반적 편견인데요, 이는 상식 자체가 완전하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로너건 신부님은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편견이 바로 일반적 편견이라고 하시는데, 세상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을 그르다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로는 극적 편견인데요, 이는 자신이 가진 심리적 상처 때문에 어떤 대상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 편견들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과 군중들의 일반적 편견으로 인해 배척받으셨고,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집단적 편견에 의해 고발당하셨으며, 헤로데와 빌라도의 개인적 편견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편견을 얼마나 조심해야 할까요? 편견이 모이면, 사람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도 심지어 이에 대해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리의 근원이심을 고백하며, 우리가 가진 편견들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편견이 깨질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편견이 쌓일수록 진리이신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는,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 안에서, 자신이 전한 하느님 말씀으로 인해 거부 당하고 박해받은 예언자들의 고독한 운명이, 예수님의 처지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가시는 아마도 바오로 사도가 앓고 있던 육체적 질병 또는 자신에 대한 반대와 박해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들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흔히 기도가, 우리의 요구 조건을 반복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기도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장점은 좋은 것이고, 약점은 나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의 약함이, 내 힘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기쁘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약점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약점에 대한 자신의 편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약해서 다행입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나서 그 일을 한 줄 압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나의 힘의 원천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주위의 사람들, 내 가족과 이웃, 동료와 성당에서 만나는 교우들을 다시 바라보아야겠습니다.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요? 그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몇 가지 정보를 토대로, 그를 정말로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혹시 나야말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얼마나 엄청난 하느님의 선물인지, 나는 제대로 알아보고 있을까요? 나의 약함이 그러하듯, 어쩌면 그 사람의 약함도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믿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는 “네 믿음이 참으로 장하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써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릴까요? 믿지 않음으로써 놀라게 해 드릴까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Пікірлер: 4

  • @user-fk7oh1pc7b
    @user-fk7oh1pc7b8 күн бұрын

    찬미예수님 ❤ 영육간에 강구함을 주소서 Amen 🙏

  • @user-mq2db4zt2k
    @user-mq2db4zt2k8 күн бұрын

    신부님!감사합니다.❤❤❤

  • @gloriasuh3432
    @gloriasuh34328 күн бұрын

    주일 치유 말씀. 깊은상처, 후회, 자신에 대한 용서의 마중물이 되는, 금과옥조로 새겨지기를 명심합니다 감사합니다 😂

  • @user-zv1pf2el2n
    @user-zv1pf2el2n8 күн бұрын

    '우리의 약함이,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나의 힘의 원천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나의 부족함에도 은총이 있음을 늘 자각하도록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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