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 한국사 313회] 행주대첩 권율이 솥을 쓰고 싸우는 이유 feat 삼국지연의

독성산성에 주둔해 있던 권율은 병력 중 2,300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명연합군이 곧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할 것이라 믿었고 그때 군을 출격하여 적의 후방을 치려 하였다.
그리만 된다면 일본군은 양쪽에서 쌈 싸 먹히는 형국이 될 것이며 서울도 수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전쟁의 흐름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 패한 뒤 완전히 쫄아버려 꼼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방을 염려한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치려 하였다.
이를 감지한 척후병이 달려와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장군... 왜적들이 이곳 행주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병사는 얼마나 되어 보였느냐?"
"못해도 3만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군의 10배가 넘는 병력이 아닌가? 도대체 연합군은 한성을 치지 않고 무엇하는 것인가?"
다행히 행주산성은 이미 방어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래로는 한강을 끼고 있고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이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흔히 석성은 없고 토성만 있다고 알려졌지만 2017년에 석성 일부가 발견되어 산 정상부에 450m 길이의 석성이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산성 아래에는 이중으로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고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천자총통 등 각종 화기도 준비되어 있었다.
행주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김천일과 승병장 처형 등 의병을 포함하여 약 3천 명이었고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총지휘하였다.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3만여 명의 군사를 7개 부대로 나누었다.
1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이시다 미츠나리, 3군 구로다 나가마사 4군 우키타 히데이에 5군 킷카와 히로이에 6군 모리 히데모토 7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각 군을 이끌었다.
그야말로 일본의 어벤져스라 불리는 이름있는 장수들이 모두 모였다.
최고의 장수들에 3만의 군사...
누가 보더라도 행주산성은 일본군에게 곧 함락될 운명으로 보였다.
1593년 2월 12일(음력)
마침내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임진왜란 #행주대첩 #권율 #삼국지연의 #제갈량 #고니시유키나가

Пікірлер: 102

  • @user-zt7lu7kd2k
    @user-zt7lu7kd2kАй бұрын

    제1공신은 권율의 목책건설은 하지말라햇는데 명령을 어기고 목책설치와 진흙까지 바른 조방장조경이죠

  • @user-byuljeonnam
    @user-byuljeonnamАй бұрын

    권율의 리더십과 충무공의 위엄 그리고 화력의 승리군요.

  • @user-hf7bz4rl5s
    @user-hf7bz4rl5sАй бұрын

    말로만 듣던 행주산성의 전투를 아주 재미나게 잘 들었습니다.

  • @user-ii8rd8yr9k
    @user-ii8rd8yr9kАй бұрын

    역사천재 팩스토리 추가 고증정보에 해석까지 있으니 이해가 쏙쏙됩니다😊

  • @2345pok
    @2345pokАй бұрын

    오늘도 잘보구가요

  • @ston9966
    @ston9966Ай бұрын

    나름 역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인데... 행주대첩을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게 접해보긴 처음이네요~ 대단하십니다 👍

  • @js2850
    @js2850Ай бұрын

    진짜 행주산성 영화로 만들면 대박 날듯 꼭 보고싶네요 그리고 행주대접하면 행주에 돌을 옮기며 고춧가루 뿌린 전투로 알고 있었는데 권율 장군님의 미덕까지 오늘 정말 알찬 영상이였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user-ww9tk9hp4o
    @user-ww9tk9hp4oАй бұрын

    고려시대 에는 의병(김윤후.백성)들이 충분한 보상 벼슬등을 받았는데 조선시대 엔 왕이 무책임해 명이 나라를 되찾아준 은혜 (재조지은)이나 외치고 임진왜란때 싸워준 (관군.수군.의병.승병)들의 이름은 싹 묻히고 명장수.이름없는관리 들이 영웅취급을 받고 있으니....😢

  • @user-ss7xh2nk2z

    @user-ss7xh2nk2z

    Ай бұрын

    오히려 죽이거나 옥에 가뒀죠

  • @user-hs9co4rt2r

    @user-hs9co4rt2r

    Ай бұрын

    고려 띄어주는 것 좀 적당히 하길 무신정권 때 백성들 고혈을 얼마나 빨아재겼는데 그리고 군인 대우 좋았으면 100년 무신정권이 왜 일어났겠냐 으이구....

  • @user-ww9tk9hp4o

    @user-ww9tk9hp4o

    Ай бұрын

    조선전기는 백성들한테 좋은시기 였는줄 암 사실 기록이 많이 없어서 그렇지 지방의 관리 들이 백성들한테 고혈을 많이 빨았는데 만약 황해도 평안도 지역이면 관리들의 횡포가 심한건 말할필요도 없고

  • @colt7057

    @colt7057

    Ай бұрын

    @@user-hs9co4rt2r 의병대우를 말하는데 먼 으이구?

  • @user-hs9co4rt2r

    @user-hs9co4rt2r

    Ай бұрын

    @@colt7057 느가 괄호 치고 관군이라 썼냐 안 썼냐?

  • @agm1144
    @agm1144Ай бұрын

    행주대첩 TMI 1. 행주산성은 없었다. 전투 무렵 성곽은 없었음. 삼국시대 성벽 유적 일부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온전한 성채가 있었던건 아니고 경사면에 녹로와 목책을 둘려쳐 방어진형을 구축해 싸웠음. 사료에는 당시에는 성곽은 없고 옛 성터가 있어서 성산(城山)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음. 성산에 성이 축조된건 왜란 이후의 일임. 2. 돌을 날라준 아낙네는 허구다. 조선 후기, 성산의 산성을 행주산성이라 불렀는데 호사가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서 행주라는 이름이라는 뇌피셜 굴려 창작한 이야기임. 전투 당시는 성도 없고 그냥 한강변 야산에 진지를 구축한 상황이였기에 그 곳에 민간인이 있을 이유가 없었음. 3. 권율은 거기서 싸울 뜻이 없었다. 조명 연합군이 한양 탈환을 시도하면 여기에 가세하기 위해 여러 조선의 장수들이 서울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고 권율의 부대도 그 중 하나였음. 한양 탈환전을 위해 잠시 머무는 숙영지였지 거기서 대군을 맞아 싸울 계획은 원래 없었음. 그래서 처음 권율의 부대는 목책 같은건 설치하지도 않았음. 그런데 조명연합군의 한양 탈환전이 무기한 보류되자 한양 주변에 주둔한 조선군들은 일단 물러날지 아님 계속 머물지를 논의함. 권율이 그걸 다른 진영의 장수들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부하 장수들이 혹시 일본군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목책을 치며 방어 진지를 구축해버렸음. 연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행보관이 병사들 갈궈서 참호판 셈. 그런데 갑자기 한양으로부터 3만의 일본군이 권율이 머문 성산으로 몰려오는 바람에 권율도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우게 된 것. 4. 사실 성산 주변에 다른 조선군들이 여럿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황이 절망적이라고 아무도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 여기에 빡친 권율은 장계를 올리며 이들을 극딜하는 내용을 실었다. 단지 충청 수사가 배로 활과 포탄 등의 물자를 공급해준게 유일한 외부 지원이였다. 5. 일본군은 전쟁 당시 이순신 이름도 몰랐다. 진주대첩의 패배가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되었는데도 김시민이란 이름도 몰라 '모쿠사(목사)'라고만 기록한 일본이였다. 이순신 이름 석자도 당연히 몰랐고 그냥 조선 수군이 무섭다 정도로만 인식했다. 일본군이 전투를 중단하고 물러난 가장 큰 이유는 예상못한 조선군의 저항에 이미 적잖은 피해와 피로가 누적되었는데 상당한 규모의 지원군(사실은 조운선 선단이였다)들이 몰려오는걸 보고 사기마저 크게 꺽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군 지휘부는 무리하게 공세를 지속하지 말고 일단 물러나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공격을 중단하고 한양으로 물러났다. 6. 전투가 끝나자 권율은 미련없이 성산에서 철수했다. 한양탈환전이 무기한 보류된 이상 권율로선 거기서 목숨걸고 싸우며 버틸 이유가 없었다. 일본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자 권율은 즉각 성산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안전한 곳으로 퇴각했다. 그 직후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이 다시 성산으로 몰려왔지만 그들이 목격한건 불타버린 목책과 텅빈 성산이였다. 물론 이걸로 일본군은 자신들이 이긴 걸로 정신승리를 시전했음은 뻔한 일이였음.

  • @user-ck7my9xj2w
    @user-ck7my9xj2wАй бұрын

    선생님 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 @user-ob6sf6qz8k
    @user-ob6sf6qz8kАй бұрын

    감사함당

  • @user-gp1yg7te1m
    @user-gp1yg7te1mАй бұрын

    정말 다음회가 기다려 짐니다요~~

  • @user-jf2tg2vc7e
    @user-jf2tg2vc7eАй бұрын

    오늘도 잘 봤습니다. 다음 회 기대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user-dn3fv4wk6h
    @user-dn3fv4wk6hАй бұрын

    여전히 재밌고 흥미진진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감사~~^^

  • @j8663
    @j8663Ай бұрын

    권율장군이 밥솥을 쓴건 군사들 사기를 돋구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일본군들에게 본진 까지 밀린 상황에서 정신없이 싸우다 일본군의 칼에 쓰고 있던 투구가 날아가 버렸을것이고 급한데로 밥솥이라도 쓰고 싸웠다고 봄

  • @timn8365
    @timn8365Ай бұрын

    영화로 만들면 천만관객흥행

  • @user-jl8jk3vy6q

    @user-jl8jk3vy6q

    Ай бұрын

    제작비 때문에 ..

  • @user-uz5fq3zq1b

    @user-uz5fq3zq1b

    Ай бұрын

    진짜 드라마틱하네요.

  • @user-xo6wq8wr3x
    @user-xo6wq8wr3xАй бұрын

    잘볼께요 너무나도 좋기만 하네요

  • @facstory

    @facstory

    Ай бұрын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uo1dv5pv8k
    @user-uo1dv5pv8k8 күн бұрын

    저 사악한 일본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피와 눈물로 써내려간 역사가 맞네요~

  • @agm1144
    @agm1144Ай бұрын

    1.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 이후 평양에 주저 앉은건 군량미가 바닥나서였음. 이여송은 급히 조선으로 오느라 군량미를 마련하지 못하고 병력만 이끌고 조선으로 왔음. 조선이 군량미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 그러나 평양성 전투 후 명군은 약속한 군량을 받지 못해 굶주리기 시작했음. 조선 조정이 군량 마련에 실패하곤 배째라를 시전했음. 이것 때문에 이여송이 류성룡에게 격하게 항의했고. 군량을 안주면 명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까지 했음. 이러니 한양 진격은 엄두도 못낼 지경이였던 것

  • @agm1144

    @agm1144

    Ай бұрын

    행주산성에 성벽은 없었음. 삼국시대 성벽 유물 일부가 남아있었던거지 온전한 성이 이니였음. 실록엔 그곳에 성이 있었느냐는 선조의 질문에 성은 없고 성산이라 불리는 야산이였다고 답하는 내용이 있음

  • @nimo3414

    @nimo3414

    Ай бұрын

    벽제관에서 패배한 뒤 왜군공포증이 생겨 틀어박혔는데 뜬금없이 군량미 부족이라니.전투를 하든 안하든 군량미는 소모되는 겁니다

  • @user-jg4jw2sl8s
    @user-jg4jw2sl8s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잘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행주산성 전투 내용은 『임진전란사』 내용을 많이 인용하신 듯합니다. 임진전란사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셨더라도, 이미 행주산성 전투 관련 연구들은 거의 대부분 이 책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어서... 다만, 이 책은 행주산성 전투 서술에 있어서 오류가 꽤나 많습니다. 1593년 2월 12일(음력) 행주산성 전투와 관련해서 첨언을 좀 하자면, 영상에서 행주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으로 소개된 '김천일'과 '선거이'는 당시 각각 강화도와 금주산(지금의 금천구)에 있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2월 12일 정오쯤에 도체찰사인 유성룡은 당시 절도사였던 이빈에게 일본군이 양천에 주둔한 전라감사 군대(권율군)를 침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전투가 새벽 5시~6시 경 벌어졌으므로 이빈의 이 급보는 행주산성 전투에 대한 보고 중 가장 빠른 것입니다. 여하튼, 이때 유성룡은 보고를 받자마자 주변에 있던 '각진영'과 '의병'들에게 구원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만, 이들 중 실제 행주산성에 도착해 실질적으로 지원군으로 참전한 부대는 없었습니다. (전투 이후 선조를 직접 인견한 신경희도 주변에 부대들이 마땅히 와서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오지 않았다고 분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투 막바지에 정걸 또는 이빈(이 이빈은 수사, 즉 수군지휘관으로 앞서 유성룡에게 보고를 전한 절도사 이빈과 다릅니다.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도 다름)이 배 2척으로 화살을 보급해주었을 뿐, 실제로 전투에 지원을 했던 부대는 없었습니다. 배로 화살을 보급해준 것이 정걸이냐 이빈이냐는 또 기록마다 상이합니다. (선조실록, 난중잡록,연려실기술 등은 정걸/선조수정실록, 일본전사 조선역 등에서는 이빈) 특히, 영상 내용 중에 양천강(한강)을 거슬로 올라오는 조운선을 보고 승기를 잡던 일본군이 '이순신'의 배라고 생각하며 급히 퇴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만, 김 빠지게 해서 죄송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약 40여척의 조운선이 전투가 거의 끝날 무렵(신경희의 표현을 따르면 '황혼 무렵'-해질 무렵이면 전투가 거의 끝날 때쯤 입니다.)에 행주산성 근처에 당도하는데, 타이밍이 절묘한건 사실이지만 전투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습니다. 신경희도 이를 보고 "그날 적이 물러갈 때에 마침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이 양천 포구를 뒤덮고 왔다...."라고 말하는데, "그날 적이 물러갈 때에"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이미 전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 전라도 조운선이 도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라도 조운선을 보고 퇴각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측 기록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집니다. 전라도 조운선을 목격한 내용은 당시 7군으로 참전했던 시모세 요리나오의 기록인 『조선도해일기』에도 나옵니다. 서술 맥락을 보면 '모리 가문의 가신단 40여명이 부상을 입고, 주군의 갑옷에도 수많은 화살이 박혔다.(여기서 주군은 아마 시모세 요리나오의 주군이었던 '요시미 모토요리'를 말하는 듯 함) 우키타(우기타 히데이에), 깃카와(깃카와 히로이에), 이시다(이시다 미츠나리), 마에노(마에노 나가야스) 님 등 유명한 다이묘들도 부상을 입었고, 하급 병사들의 부상자와 전사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수백 척의 배가 돛을 단 채로 다가오자 '뒤에서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따라 해가 질 무렵에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2월 12일 해질 무렵까지 공세를 퍼부었지만 일본군의 사상자만 늘어가고 공격에 진척은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이미 다음날 다시 공격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안서군책』『음덕태평기』 『요시다이야기부비』 등 다수의 일본 기록에서 말하듯(모두 7군쪽 기록이긴 합니다만...) 깃카와 히로이에가 승병들이 주둔한 서북쪽 '子城'을 넘어 한창 공격 중일 때 삼봉행들로부터 '오늘은 아군이 사상자가 많고 지쳤으니 다음에 다시 오자, 이만 군사를 물려라'라는 지시를 이미 받습니다. 물론, 이 기록들이 깃카와 히로이에의 공적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자신들의 주군(깃카와)은 잘 싸우고 있었는데 다른 지휘관들이 군대를 물리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라는 식으로 일종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일본군이 거의 승리할 뻔한 전투였는데, 마침 전라도 조운선이 당도해 이를 이순신의 함대로 착각한 일본군이 퇴각했다'라는 식의 설명은 사실이 아니며, 상황을 매우 과대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매우 훌륭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생각만큼 당시 일본군 내에서 그렇게 '有명'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유명'하지 않았다는 건 이름이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나오는 건, 일본인들이 징비록 등 조선과 명나라 측 기록을 입수하고 나서인 1600년대 중후반부터 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조선 측 기록을 통틀어서 보아도, 행주산성 전투의 최대 위기는 '승병이 지키던 서북쪽 자성이 한 때 뚫렸을 때'였습니다. 이때 적들이 돌입했다는 소문이 성내에 퍼져 민심이 흉흉해지고 사기가 떨어지자, 권율이 도망가는 자를 참수해서 본보기로 삼고 휘하 제장들에게 재돌격을 명하면서 적들을 성 밖으로 다시 몰아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일본 측 기록은, 우키타 히데이에, 깃카와 히로이에, 모리 모토야스의 세 부대가 합심해서 두번째 마루(일본군은 당시에 행주산성을 三ノ丸-삼노마루, 즉 내성, 외성, 목책 등으로 구분해 놓고 있었습니다.)까지 치고 올라가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이미 다른 부대들이 다 물러간 상태라 공격이 지속되지 못했고, 도망쳤던 조선군이 다시 돌아와 치열하게 항전하면서 일본 측 사상자가 늘어감에 따라 다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영상에서처럼 행주산성의 조선군이 거의 함락직전까지 가서 거의 자포자기했다는 식의 표현은 오류입니다. 오히려 권율은 전투가 끝난 뒤에 행주산성의 전투가 이치전투보다 쉬웠다고 말했습니다.(물론 쉬웠겠느냐마는,, 권율 자신의 표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백사집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진편성, 성내 부녀자 등 민간인의 존재, 변이중 화차나 신기전 같은 화차'전설'의 실상 등...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은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추후 내용을 추가하던지 하겠습니다.

  • @facstory

    @facstory

    Ай бұрын

    긴 글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 @jongwookchoi7582

    @jongwookchoi7582

    Ай бұрын

    우리측 기록은 안중에 없고 일본측 기록에만 의존한 듯한 인상인데... 전후 기록이란 어차피 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기술하게 되어 있는 것. 세상어떤나라도 마찬가지. 때문에 이쪽기록과 저쪽기록을 취합해서 객관성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지...상대국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옳다할일이 아닌것임.

  • @user-jg4jw2sl8s

    @user-jg4jw2sl8s

    Ай бұрын

    @@jongwookchoi7582 답글 감사합니다. 우선, '이쪽 기록과 저쪽 기록을 취합해서 객관성을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을 둘 다 제시해드린 것입니다. 다만, 일본군이 패퇴하는 시점에 한강에 뜬 40여척의 조운선을 보고 '이순신의 함대다'라고 여겼다는 부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려면, 필연적으로 일본 측 문헌을 참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일본군 내부 사정이니까요. 따라서 일본 사료를 제시해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측 기록에만 의존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영상에서 1군부터 7군까지 차례로 성을 공략하는 장면 자체가 일본 측 기록에 의거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측 사료에는 행주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에 대해 그다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홍기,백기로 진영을 나누어서 진격했다, 누각을 만들어 공격하길래 조경이 현자포로 쏘아서 무력화시켰다, 우희다수가(우키타 히데이에)가 유시에 맞아 부상했다 등이 전부입니다. 행주산성 침략군의 편성을 1군 고니시부터 7군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로 말하고 있는 문헌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조선도해일기』이고,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도 이 기록을 토대로 1군~7군의 편성을 똑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주산성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거의 모든 서적, 연구(심지어 유튜브 영상들까지도)에서도 위의 『조선도해일기』를 토대로 일본군의 진편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시면 바로 아실 겁니다. 그런데 1군 고니시가 어쩌구 2군이 어쩌구 하는 등의 세세한 내용은 문헌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임진전란사』의 저자의 주관적 견해와 상상으로 만들어진 내용입니다. 이것이 주관적 견해이자,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과 일본의 기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조선 기록에 일본군의 공세를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진격했다'(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간이집, 백사집,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만취당실기,춘파당일월록) 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홉 번 와서 아홉 번 물러갔다'(상촌집, 재조번방지)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7번이라고 설명하는 문헌은 단 한 건도 없음에도, 위 『조선도해일기』를 토대로 '7개의 부대로 편성했으니 7번 공격을 왔겠구나'라고 단순 추론해서 서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들은 7번대가 차례차례 질서있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행주산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정면 뿐만 아니라 우측으로 우회해서 공격한 부대가 있었고,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키타 부대와 깃카와 부대, 모리 부대가 합심해서 서북쪽 자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조선도해일기』『일본전사 조선역』『음덕기』) 또 누각을 만들어 조총사격을 실시한 부대가 3번대 구로다 나가마스의 부대라는 것도 기록적 증거가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행주산성이 석성이냐 토성이냐 말이 많은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토성과 석성을 혼합한 土石城입니다. 행주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고양 행주산성 석성구역(1단계)」(김지호, 안성현,2019) 등의 논문에 나와있으니 읽어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석성터가 실제 행주산성 전투의 실제 그 산성터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니 저는 기록의 차원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조선 측 사료를 보면, 신경희는 전투 직후인 2월 24일에 선조를 직접 인견하고 행주산성 전투에 대해 상세히 문답합니다. 이 내용은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해서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때 선조가 '그 곳에 성이 있는가?" 其處有城乎 라고 묻습니다. 이에 신경희는 '먼저 녹각을 설치한 뒤에 토석성을 쌓았습니다." 先設鹿角後, 築土石城矣 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일본 측 사료에서는, 『태합기』 "요새를 건설하고 밤사이에 성벽을 쳤다" 『조선도해일기』 "성 주변에는 돌담과 울타리가 있으며, 한쪽은 큰 강, 한쪽은 논과 밭, 한쪽은 험한 산, 한쪽은...... 이루어져 있다. 十二日都より三里計西の大海の上に高麗人新城墎を搆へ廻りには石垣(돌담)さかも木をし廻し一方は大河一方は田沼一方はたき山一方は少足立克候 『안서군책』 "적들이 성을 쌓고 두겹 세겹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높은 돌담을 쌓고,,,, 爰ニ都川ノ邊三里計河下ニ都ノ兵粮入置タル倉アリ此河向ノ山ニ敵取出ノ城ヲ構二重三重柵ヲ結石垣高(높은 돌담)ク築逆茂木ヲ引人數二三萬楯籠都へ往來ヲ妨ケリ.. 『요시다이야기』 돌담을 높게 쌓고, 울타리(목책)을 둘러... 一都川より三里計川下に安南府と云ふ所あり都に在陣の日本勢兵粮を置候藏本なり川の向に山あり此山に明兵取出の城を築き石垣を高くし(돌담을 높이하고 정도?)柵をふり人數二三萬計楯籠り帝都への往來を妨候 .. 등 석벽의 존재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위에 "전후 기록이란 어차피 아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기술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 임진왜란 바로 직전까지 봉건 영주들이 대결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아군'은 '우리측 다이묘'에 한정된 것입니다. 같은 일본군이라도 다른 가문 군대에 대해서는 혹평을 아끼지 않습니다. 행주산성 전투만 봐도, 『흑전가기』에서 행주산성 전투에서 싸운 아군에 대해(자기들 부대는 쏙 빼고) "우리 군대가 전략이 없고 적에게 속았다, 그래서 다음날 행주산성을 향해 구로다 나가마사가 자신의 부대만을 이끌고 단독 출정했다"고 다른 아군 부대에 대해 혹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다음날 단독 출정했다는 기사는 교차검토가 되지 않으므로 사실이 아닌 허구로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일본 문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기네 일본군에게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2월 12일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패퇴했는데, 자신들의 패배를 합리화하려면 '적들이 생각보다 강했다'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적들은 약했는데 우리가 실수했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주산성 전투처럼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에 대해서 일본 문헌을 참고하는 것은, 존선 측 문헌과 충분히 교차 검토한다는 가정 하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습니다. 변명이 긴데, 제가 행주산성 전투와 관련해 참고하고 있는 사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조선 문헌은 39종 이고(행주산성 전투에 대한 직접 및 간접 언급 사례 모두 포함), 일본 문헌은 15종입니다. 혹시 궁금하신 내용이나 의문점, 비판할 것 등 있으시면 가감 없이 모두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user-jg4jw2sl8s

    @user-jg4jw2sl8s

    Ай бұрын

    구로다 나가마스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오기입니다.

  • @user-sl6dh2bt6x

    @user-sl6dh2bt6x

    Ай бұрын

    잘 아시다시피 행주산성을 포위했던 1~7군들은 일본 육군들이었으며 일본수군(따로 수군 8군이 있었음)이 아니였기에(1593년 2월경쯤엔 이미 장군님께 엄청 깨진 일본수군 장수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중에 일본 스파이 또는 조선 포로들에 의해 다 알고 있었음) 이순신 장군님과 바다에서 싸워보지 않은 일본육군 장수들은 당연히 모르는 것이 당연하죠. 그들도 육지에서 자신들이 원래 세운 시나리오도 삐끗하여 거우겨우 실행하기 바빴기에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대편 조선장군의 이름까지 알 필요가 없었지요. 그저 일본 수군의 연패만 알고 있었을뿐 자신들도 육지에서의 전투가 원래 계획대로 되지못하여 히데요시의 책망이 무서워 보고서 책임자는 어떻게 써야할지를 두려워 눈치를 봐야 할 판에 그들이 조선수군 장군의 이름을 왜 알려고 할까요. (추신-바다에서 조선수군과 싸우기도 바쁜 일본 수군 병사들은 몰랐겠지만)

  • @user-zl3rc9wl4g
    @user-zl3rc9wl4g13 күн бұрын

    감사합니다 구독합니다 ^^

  • @no89423
    @no89423Ай бұрын

    행주산성 영화 꼭 만들어져서 일본에 수출까지 해야죠 ㅋㅋ 무려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킨 미츠나리가 나오니깐요.

  • @user-oy2mo5tn1m
    @user-oy2mo5tn1mАй бұрын

    주말에 식사하면서 보는 팩한국사 영상은 너무 좋군요!

  • @facstory

    @facstory

    Ай бұрын

    식사 맛있게 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 @yaegereren8154
    @yaegereren8154Ай бұрын

    대단하도다

  • @호밀
    @호밀Ай бұрын

    잘보고갑니다

  • @user-cy6ju8dx7p
    @user-cy6ju8dx7pАй бұрын

    역시 권율과 그 군사들의 소울틱한 리액션과 퍼포먼스야말로 육군들의 품위 그 자체다 ㄷㄷ

  • @user-ww9tk9hp4o
    @user-ww9tk9hp4oАй бұрын

    이순신장군이 천자총통을 권율장군 에게 도움을 받고 천자총통을 준거같진 않은거 같아용~

  • @erico593
    @erico593Ай бұрын

    권율은 한국 자손이라는 명확한 증거대 대갈장군! 멋짐

  • @lfktrkrzkx8162
    @lfktrkrzkx81628 күн бұрын

    아깝네요.

  • @user-ky6pn9cn6d
    @user-ky6pn9cn6dАй бұрын

    10:45 신이 대신 답하겠습니다. 철수 대신 영희!!!!!

  • @user-iq7ky4fk7q
    @user-iq7ky4fk7qАй бұрын

    언젠가 행주대첩도 영화화 됬으면 좋겠당

  • @monologue2347
    @monologue2347Ай бұрын

    거기서 권율이 죽을뻔한건 오늘 첨 알았네요

  • @HeeheeHe-wi5px
    @HeeheeHe-wi5pxАй бұрын

    오호

  • @HistoryLactobacillus
    @HistoryLactobacillus27 күн бұрын

    10:18 ㅋㅋㅌ 비교가 되다니요 ㅎㅎ

  • @rupael1
    @rupael1Күн бұрын

    1:28 처형 - 처영 스님 감사

  • @user-jj8rs1du8i
    @user-jj8rs1du8iАй бұрын

    아역시전쟁은 지휘관의능력이 중요하구나 군관민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한마음한뜻으로 임전한다면 10배의적군도 물리칠수있구나

  • @user-vj5pf4ry8l
    @user-vj5pf4ry8lАй бұрын

    투구가 너무 낡아서 급한마음에 가마솥을 쓰고 전투에 임한것이다.

  • @user-fr4rr6ew8w
    @user-fr4rr6ew8wАй бұрын

    행주연의

  • @special1275
    @special127521 күн бұрын

    행주치마 입고 돌 던졌다는 야사는 거짓으로 알고 있습니다

  • @user-mw5od1hu5c
    @user-mw5od1hu5cАй бұрын

    길은 만들면 되고

  • @cijjeehh2302
    @cijjeehh2302Ай бұрын

    행주대첩때 일본군이 어떻게 이순신을 알죠?

  • @Unji-apart
    @Unji-apartАй бұрын

    이 싸움이 무엇을 낳았는지 우린 알고 있다

  • @4spikespiegel47
    @4spikespiegel47Ай бұрын

    155mm 고폭탄을 막기위해

  • @user-fc8wy1fd6i
    @user-fc8wy1fd6iАй бұрын

    원래 커마 이상하게 하고다니면 고인물이잖아...테메에엣!!!

  • @user-kd9lm6kh5c
    @user-kd9lm6kh5cАй бұрын

    저때는 저런 라면 끓이는 얇은 냄비는 없었던거 같은데

  • @francissuh4724
    @francissuh4724Ай бұрын

    행주대첩 주력 역시 수군과 마찬가지로 호남 병력.

  • @paperplaner
    @paperplanerАй бұрын

    1:33 어떻게 이름이 처형 ㅋㅋ

  • @user-pg7jk1nt3e
    @user-pg7jk1nt3eАй бұрын

    보급

  • @junok1321
    @junok132113 күн бұрын

    솥을 쓰고 제대로 싸울수가 있나???ㅋㅋㅋ

  • @sfk1031
    @sfk1031Ай бұрын

    조총 맞으면 아프니 가마솥이라도 썼겠지. 지금 총이면 가마솥은 효과 없지만 화약이 비싼데다 새를 잡던 위력으로 낮쳐서 화약을 극단적으로 아껴서 가마솥으로도 충분했겠지. 영화처럼 화약을 팍팍 넣었을까? 그게 다 돈인데 한약처럼 종이로 말아서 조금씩 넣었지. 지나치게 위력이 강하면 조총이 터질 가능성도 높고 나무판을 관통할 위력까지는 아니였으니 최초의 방탄모였겠지.

  • @user-pc8ez3vd4o
    @user-pc8ez3vd4oАй бұрын

    조선군도 행주대첩에서 백병전으로 일본군이겼는데 아세요?

  • @user-zx8dm2xs8r
    @user-zx8dm2xs8rАй бұрын

    왜군은 저격에 특화되어있었다. 권율이 솥(철모)을 쓰고 싸운이유였다.

  • @reelsuper4737
    @reelsuper47378 күн бұрын

    저거 되게 이상한게, 1개 군이 공격해서 성문을 뚫었을 때 나머지도 다 같이 공격하면 이길 텐데 왜 1개 군대만 싸우죠?

  • @user-xo7mq5ih4v
    @user-xo7mq5ih4vАй бұрын

    왜 자꾸 다음을 기다리게 하는거야. 이거 사기야

  • @sammanwan
    @sammanwanАй бұрын

    전시에 밥해먹으려고 쓰고 다니나

  • @hue1121
    @hue1121Ай бұрын

    3빠

  • @user-tp2sx5it3i
    @user-tp2sx5it3iАй бұрын

    참고로 일본의 어벤저스는 임진왜란에는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런게 진짜 일본의 어벤저스지.

  • @kmlee8824

    @kmlee8824

    Ай бұрын

    그들이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엔 저들이 임진왜란에서 패퇴하여 병력을 잃어서 그렇게 된겁니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나 토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당대 일본 최강이라 칭하던 장수들이었고,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후에 그들을 밀어내고 막부를 설립한 배경에는 그들이 패퇴하는 바람에 가능했습니다... 안그랬으면 제거당해서 역사에서 사라졌을겁니다...

  • @applepie5877
    @applepie5877Ай бұрын

    조방장 없었으면 권율은 대역죄인이 될 뻔 했지....조방장이 멍청한 상관을 잘 보필했기 때문에 오늘날 존재하는 듯...

  • @user-eq5ho5sr1d

    @user-eq5ho5sr1d

    Ай бұрын

    행주 대쳡 승리 하고 조방장 이 군율 어긴거 죄를 청했는데 권율이 조방장을 행주대첩 1등 공신으로 장계 올림 부하의 전공을 탐내는 원균 하고는 차원이. 틀림

  • @applepie5877

    @applepie5877

    Ай бұрын

    @@user-eq5ho5sr1d 그걸로 처벌하면 그게 사람인가요...

  • @user-jf6fc9bt1f

    @user-jf6fc9bt1f

    Ай бұрын

    @@applepie5877 부하 잘둔것도 다 장수의 덕이고 뒤에 정당하게 장계 올린거보면 올바른 사람임 막발로 지휘관 개같으면 나몰라라 하는게 졸들인데 안튀끼고 자기 소임다하는거 보면 모름???

  • @user-jj8rs1du8i

    @user-jj8rs1du8i

    9 күн бұрын

    멍청한지휘관이 절대병력열세에서 대승을거둠니까

  • @wa8705
    @wa8705Ай бұрын

    권율은 행주산성 빼곤 그닥. 늘 겁많고 눈치보는 사람일뿐. 원균패서 전쟁터로 보낸것도 그렇고, 그닥 나라에 큰 도움은 아닌듯. 진정 도움자는 전쟁에서 죽죠. 원균은 균이니까 예외

  • @user-jf6fc9bt1f

    @user-jf6fc9bt1f

    Ай бұрын

    이건 또 뭔 쌉소리야? ㅋㅋ 원균패버린건 존나 잘한짓인데 죽인거보다야 못하지만 권율아니면 누가 원균을 조패겠음?

  • @eileenchang749
    @eileenchang749Ай бұрын

    임진왜란시 행주대첩을 왜곡해도 유분수지 여기에 왜 이순신 장군이 나오나? 한마디로 무식한 자들이 떠드는 잡소리에 불과하다.

  • @user-dh5kx8zj9t
    @user-dh5kx8zj9t3 күн бұрын

    선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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