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일제강점기의 팩트들

일제강점기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자

Пікірлер: 6 100

  • @hansgunter6126
    @hansgunter6126 Жыл бұрын

    일본 욕 하기 전에 그 때 왜 병신같이 나라를 뺏겼는지? 내부의 적은 어디에 있었는 지부터 살펴보고 다시는 그런 놈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맨날 일본 탓이나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러길 바라는 놈들이 지금 우리 내부의 적입니다.

  • @user-xi3iq3cf3j

    @user-xi3iq3cf3j

    Жыл бұрын

    그냥 민비년이 나라 망친거 아님? ㅋㅋㅋ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3 ай бұрын

    그 내부의 적이 친일파인게 문제입니다.

  • @LLMD42

    @LLMD42

    3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그렇죠 친일파의 대부분이 민주당에 있으며 그런 민주당은 이번에는 반일정서를 퍼뜨리며 친중행세를 통해 또다시 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 @user-tp1ue8lc2b

    @user-tp1ue8lc2b

    3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친일파가 문제냐? 간첩이 문제지

  • @user-hamburger795

    @user-hamburger795

    3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 그게 아니라 그냥 일본이 고종한테 이렇게 말했어. "내가 너한테 돈 줄거니까 나라 넘겨줘라"라고 했어. 고종은 돈이 한국인들보다 더 중요시했어서.

  • @lofilopie-qn7tl
    @lofilopie-qn7tl2 ай бұрын

    내가 저시대 태어났으면 난 무조건 친일했을듯

  • @user-bz7nt4fi1p

    @user-bz7nt4fi1p

    2 ай бұрын

    이하동문.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 독립운동해온 사람들은 이미 망한 조선, 아니 예전 조선 그대로 부활시키려고 한 게 아니라, 예전 조국 정부의 무능함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 때문에 일본에 의해 핍박받는 자국민들을 구출하고 조선을 계승할 새 나라를 세우더라도 이전의 악습은 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잘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거죠.

  • @user-so4sc8ge8x

    @user-so4sc8ge8x

    14 күн бұрын

    지금도 늦지 않았어 일본으로가

  • @Myeong_ei

    @Myeong_ei

    9 күн бұрын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요. 뭐라 할 것도 없이 당연한 자연적 현상인데, 왜 친일한다고 욕을 해야 하는지... 씹...

  • @cpla.master
    @cpla.master10 ай бұрын

    좌파가 부정하고 싶은 진실,

  • @real9140

    @real9140

    9 ай бұрын

    우파의 아버지 이승만이 반일을 넘어 혐일이었음 해방후 반일선동은 우파에서 대대적으로 했지 이게 팩트임

  • @kowjsux

    @kowjsux

    6 ай бұрын

    @@real9140에휴..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yubin4780

    @yubin4780

    6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이렇게 까지 긴 글은 논문이나 쓰시죠.. 유튜브 댓글로는 아무도 안 읽습니다

  • @user-fl7xy5uq7x

    @user-fl7xy5uq7x

    2 ай бұрын

    좌파우파하는 방식부터 쓸어버려야 한다.

  • @yosubi580
    @yosubi580 Жыл бұрын

    절때 이런내용은 tvn이나 방송에서 들어볼수 없는 귀한자료입니다

  • @user-si4zb8sb9l

    @user-si4zb8sb9l

    21 күн бұрын

    당연히 못보죠 선동을 위한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의 영상인데

  • @user-zt8tu8qy8s
    @user-zt8tu8qy8s Жыл бұрын

    식민지배를 당한 게 잘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너무 병신이었다.

  • @user-wb3se8sq8q

    @user-wb3se8sq8q

    Ай бұрын

    그냥 누가와도 먹힐만큼 좆밥상태였고 그냥 미개 그자체.

  • @GodSub
    @GodSub Жыл бұрын

    내가 국모다 드립치며 나라를 병신나라로 만든 그당시 지배층들이 무슨 독립이야...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22 сағат бұрын

    그 나라엔 그 개만도 못한 지배층만 살았던건 아니지. 아무리 뭐라해도 너의 나라가 이 나라를 찬탈한 것이 정당화 되진 않지. 사과하시고 배상이나 하시지? 보상 말고 배상!! 일본나라국 국가의 공식적인 반성과 배상!

  • @LeeTaeKang
    @LeeTaeKang2 ай бұрын

    어릴적 종가 할아버지께서 일제가 들어서고 길거리에 똥이 없어졌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막에서 밥먹다가 똥 마려우면 먹고있던 자리 바로 옆이나 주막 뒤 저녁이면 길가에 그냥 앉아서 볼일을 봤다는것에 충격먹었거든요 나무를 해서 땔감을 파는 일을 하는분들은 아침일찍 산에 올라가는데 수십명 이 다같이 산을 오른데요 변이 마려우면 냇가 물이 흐르는 옆으로 줄줄이 앉아서 대변을보고 그 변이 민가나 빨래터로 떠 내려오는데 그 시절에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아무것도 아닌 상황처럼 태연하게 살았다고 하셨네요

  • @user-zn7nq998

    @user-zn7nq998

    Ай бұрын

    합병초기 대부분 돈을 위생사업에 집중했고.... 일본 왕가 하사금으로 똥을 치웠다고 하니 일제가 우리에게 한 일이 이해될려면 조선말기에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면 절대 이해 못함

  • @kashiwa6775
    @kashiwa67756 ай бұрын

    냉철하고 소신있고 분석또한 놀라운 분..

  • @user-ed2ux2lk1l

    @user-ed2ux2lk1l

    6 ай бұрын

    근데 문제는 저 영상 자체가 여태까지 우원재가 했던 행위들을 전부 스스로 부정을 한다는 것임. 이전 통치 시절보다 좋은 점이 있으니 불편함 갖지 말라고 하면 우원재가 그토록 비판을 한 문재인 정권에서는 국가 신용등급이 올랐고 코로나 대응에서도 주변 국가와 미국, 유럽보다도 사망자 수가 월등히 낮으니 문재인은 의인이므로 원재는 전 정권에 불편함을 갖지 말아야 함.

  • @찬치

    @찬치

    5 ай бұрын

    ​​@@user-ed2ux2lk1l 이 영상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아예 불편해하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이자 임

  • @user-ed2ux2lk1l

    @user-ed2ux2lk1l

    5 ай бұрын

    @@찬치 그래서 우원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여서 일제가35년간 조선을 수탈한거는 부정하고있다는거잔냐.

  • @user-si4zb8sb9l

    @user-si4zb8sb9l

    21 күн бұрын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소신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영상을 보고 깨달았네요ㅋㅋ

  • @user-ng3zc2pp7k
    @user-ng3zc2pp7k Жыл бұрын

    이래서 제가 사극을 안봄. 이쁜 한복입고 좋은 기와집에서 로맨스 하는거... 아주 기가막힌 역사왜곡이자 그외 대다수 노예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것

  • @user-ei9yq6xm3u

    @user-ei9yq6xm3u

    24 күн бұрын

    사극에나오는한복은 조선시대한복이아니라 한국시대의한복입니다.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12 сағат бұрын

    @@user-ei9yq6xm3u 꼼꼼한 감독이라면 작은 소품까지도 고증하고 체크한다고 합니다. 의상 이라면 비중이 크니 드라마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통 사극이라면 웬만하면 고증 거치고 특징은 잡아 유사하게 드라마에 쓰지 않을까요?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구분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한국시대"라 하면 "한"국은 고대의 이름이었을 테고 "한국"은 제헌국회에서 국호 후보에 "한국"이 1표로 탈락했다고 합니다. 물론 "대한민국"이 1위 였으니 국호가 됐갰죠? 원래 줄인말로는 "대한"을 썼다고 합니다. 틀린 말 인지 아닌지 아리송 하긴 합니다만은 "한국시대"라는 표현은 좀 색다르게 들리네요. "현대시대의 한복" 혹은 "대한민국의 한복"이란 표현은 어떤가요?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11 сағат бұрын

    드라마는 픽션 입니다.

  • @user-dd1jz3ht2k
    @user-dd1jz3ht2k Жыл бұрын

    제대로된 역사교육은 어둠과빛 둘다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izumiaco5079

    @izumiaco5079

    Жыл бұрын

    그게 안됨. 빛을 가르치면 어둠을 무시하냐 지랄하는 놈들 따로 있고, 어둠을 가르치면 빛을 무시하냐고 지랄하는 놈들 따로 있음. 문제는 이놈들이 하나가 아니라 서라운드로 지랄을 하기때문에 그거 싫어서라도 결국 하나쪽으로 편향되게 되고 그개 기왕이면 국뽕쪽인 게 나음..

  • @user-wb4ep2mu7j

    @user-wb4ep2mu7j

    Жыл бұрын

    @@izumiaco5079 ? 뭔소리 하는거야 그래서 둘 다 가르쳐야 된다고 ㅋㅋㅋㅋㅋㅋ

  • @user-ni3lq3ws9q

    @user-ni3lq3ws9q

    Жыл бұрын

    안동김씨랑 풍양조씨 그리고 왕실 가문이 얼마나 해처먹었으면 진짜 운요호 사건으로 빌미삼아 처들어오는 일본을 그냥 별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걍 처발리냐

  • @user-qj2ou8nj5e

    @user-qj2ou8nj5e

    Жыл бұрын

    근데 빛이 없어요 가르칠게 없음 ㅜㅜ 😑😑😑😑😑

  • @newtonxxx

    @newtonxxx

    Жыл бұрын

    @@user-qj2ou8nj5e 그나마 언문…

  • @estellestell5682
    @estellestell5682 Жыл бұрын

    우리는 조선인이 아니다 한국인이다

  • @user-fk6de7ub3g

    @user-fk6de7ub3g

    Жыл бұрын

    빙고

  • @user-bn5vz6bc1t

    @user-bn5vz6bc1t

    Ай бұрын

    정답입니다

  • @user-fn4jl3px3p

    @user-fn4jl3px3p

    4 күн бұрын

    ㅇㅈ

  • @user-sz4wc6xz8c
    @user-sz4wc6xz8c Жыл бұрын

    저러니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화되지...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22 сағат бұрын

    조상이 잘못했으면 자손이라도 바로 잡으려 노력해야지 조상이 잘못했으니 먹혀도 싸고 나는 지금 먹혀서 살거라고 악을써도 너는 조센징이야. (토착왜구들은 제외함.) 현 상황에서 일본에게 얻을 건 벌로 없어. 상호 관계에서 우리는 엄청 손해보고 있는 상황이지. 일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던 사건은 이 나라의 6 25지. 일본에게 이 나라는 복덩이 인 거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 일본나라국은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일본이 먼저 손 내밀고 유화 제스춰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님? 그게 일본의 정상적 태도 아니겠어? 그런데 일본은 반대야. 왜 그런줄 알아? 아직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모질아. 니들은 아직도 일본나라국의 식민지배하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고. 잣빨랐다고 적대적 접근에 대가리 숙이고 친일을 해야함? 이 영상의 신뢰도는 몇퍼센트나 될것 같아? 의심도 안해봤을 거다. 저런 영상을 믿는 자체가 오류. 조직적이며 일본의 후원을 받아 탄생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일부 논리야. 새롭지도 않지만. 온 국민을 역사학자로 만들 심산인가? 난 역사시간이 엄청 지루하고 싫었던 사람. 그냥 밥벌이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음. 이런 영상 눈에 띄지않길 바람.

  • @elly6685
    @elly6685 Жыл бұрын

    ‘일제강점기’하면 자동으로 분노 버튼이 눌러지던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그 분노의 근거는 무얼까 고민하니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주입된 감정이더군요 원재님의 이 영상이 널리 알려져서 다른 사람들도 일본에 대해 이성적으로 고민하길 바랍니다.

  • @user-dp3ip5fb6e

    @user-dp3ip5fb6e

    Жыл бұрын

    내가 그래서 명량이나 이런거 절대 안 봄

  • @user-jv7yt1wd3m

    @user-jv7yt1wd3m

    Жыл бұрын

    @@user-dp3ip5fb6e 그냥 어렸을때부터 일본은 나쁘다라고 질리도록 들어서 그냥 보기 싫음

  • @user-ii8hy4nf7h

    @user-ii8hy4nf7h

    Жыл бұрын

    @@user-jv7yt1wd3m 말같지도 않은 소리한다. 관동대지진만 해도 이미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다. 다만, 우리가 왜 당했는지 반성할 것도 있다는 것이다.

  • @user-jv7yt1wd3m

    @user-jv7yt1wd3m

    Жыл бұрын

    @@user-ii8hy4nf7h 그냥 그런 류의 영화를 보기 싫다는데 싫어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런 얘기가 왜 나오죠..?

  • @user-lx6fv1ws8o

    @user-lx6fv1ws8o

    Жыл бұрын

    @@user-ii8hy4nf7h ㅋㅋㅋ 무지성 반일충 하나 추가요~

  • @komaru20
    @komaru2010 ай бұрын

    현타오네.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고, 그랬으면서 외국인의 노예가 되는것만 싫었나? 오히려 노비들은 일제강점기때 해방을 찾았을수도? 슬픈현실이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노비제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3 ай бұрын

    범위를 근대까지 줄인다고 하더라도 짜끄리 왕조의 타이와 제정러시아, 티베트가 조선과 같이 해당 조건에 부합된다. 또한 서양에도 아일랜드인들은 같은 동족들을 노예로 사고 팔며 부렸고, 프랑스도 같은 동족들을 갤리선 노예로 보낸 일이 있었고, 영국 속국 시절의 미국도 엄연히 같은 동족들을 '연한계약하인'이라는 이름의 노예로 사고 팔며 부린 일이 있었다! 일뽕들은 일제시대 덕분에 조선의 자국민 노예화가 없어졌다고 찬양하는 데, 정작 일본제국 역시 제국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1920년대에까지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인들 30만 명을 가라유키상으로 만들어 팔아버리는 노예로 삼았으며, 1930년 쇼와 대공황 때 자식을 공창에 팔아버리고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에는 자국민을 노예보다도 더욱 비참한 카미카제, 반자이 돌격, 1억 총옥쇄 등 자폭용 폭탄 취급한 게 2차세계대전 추축국이자 병영국가인 일본제국이다.

  • @baiksungduk

    @baiksungduk

    2 ай бұрын

    ​ㅠㅠ 갑오개혁은 아관파천후 내각 다 살해 하고 옛법을 체제 회귀합니다 1909 년 시행한 호주제로 모든 국민이 본관 과 성이 생깁니다 이제 새로 70% 가 생깁니다 분명한건 일제가 조상이 천민이나 노비였다는 흔적 을 지웠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2 ай бұрын

    @@baiksungduk "일본이 조선의 노비를 해방시켜 줬는데 조선인들이 멍청해서 일본을 욕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노비 해방은 이미 1894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나타난 것이고, 8년 전인 1886년에 노비의 세습제도 폐지되었다. 또한 1801년에는 이미 관아에서 부리던 6만 명의 공노비들이 해방되었다. 더구나 정작 일본 당국은 조선의 사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가령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백정들이 차별을 없애달라고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형평운동을 벌였으나 탄압했다.

  • @user-zn7nq998

    @user-zn7nq998

    2 ай бұрын

    @@baiksungduk 맞습니다. 그리고 조선민사령이 시행되고 근대화의 기틀이 만들어진것 같아요. 이름이 생기고, 개인사유 재산이 보장되고....

  • @bbbaaa1234
    @bbbaaa12346 ай бұрын

    호밀밭 구독자 23.9만 달성 축하드립니다. 23.8만 달성이 엊그제 같은데(진짜 엊그제인듯) 벌써 24만이 코앞이네요. 꾸준한 성장을 응원합니다.

  • @Alskeredqw
    @Alskeredqw Жыл бұрын

    영상만 봐도 일제전후 길거리 청결도 차이가 넘사벽이다 진짜....

  • @trinity1203
    @trinity1203 Жыл бұрын

    웃기는게 뭔 줄 아냐? 그당시 사셨던 (10대 후반~20대 초반) 우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일제시대에 대해서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음. 외할머니한테 항상 들었던 말은 " 일본인들이 만든 교각이나 다리는 정말 튼튼했었다. " 이말 정말 많이 들었음. 이런 말 하면 친일파 어쩌고 하겠지만 당시 사셨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다지 잘살았던 집안이 아님. 그냥 고만고만했던 집안임. 더 충격적인거 알려줄까? 당시 친할아버지 집안이 잠시 엄청 어려웠던 적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도시락도 못싸올 정도였음. 근데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할아버지를 위해서 도시락을 매일 싸와서 먹였음.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 너희 조선인은 너희 말과 글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라고 했었다지. 이건 당사자분들한테 직접 들었던 말임. 나도 한때 엄청 반일이었는데 이후 무조건 맹목적 반일만 할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음. 참고로 내 나이는 40대 중후반임.

  • @user-xk9ok3fe5s

    @user-xk9ok3fe5s

    Жыл бұрын

    징용가셨던 외조부님도.. 나라 집어삼킨 일본이 나쁜게아니라 무능하고 멍청하고 썩은 조선이 문제다. 라고하심., 사람도 국가도 똑똑해야한다고 학문을 강조하심

  • @zhenghwun

    @zhenghwun

    11 ай бұрын

    조선왕조가 나라운영을 못해서는 합리화고, 결국 고분고분 일본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잘 따르면 아무 문제 없다라는거잖아요.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을 다 죽이고 일본인을 조선으로 이주시킬수 없으니, 조선 국민을 개조(세뇌) 시킬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니 보건, 교육에 신경을 썼을거고요. 일본이 아시아를 장악하고 멀리 보려면 당연한거죠. 이걸 이런식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서, 보건위생을 운운하면서 우리가 도와줬으니 오해라며 가스라이팅으로 합리화 시키고, 불편한 진실이라며 마치 침략을 미화시키는게 불편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zhenghwun

    @zhenghwun

    11 ай бұрын

    @@user-xk9ok3fe5s그럼 그쪽 부모님이 자식 지원도 잘 못하고 잘못 키운다고 부모님 내몰고 그쪽 뺏어다가 키운다고 하면 퍽이나 네~ 그러세요 하겠습니다🤪

  • @skelox9092

    @skelox9092

    11 ай бұрын

    @@zhenghwun 일본 아니었어도 어차피 청나라 아니면 소련한테 식민지 당할 처지였어요 당시 조선은

  • @user-it9kf9lj6b

    @user-it9kf9lj6b

    10 ай бұрын

    일제 강점기때 한글날도 생겼어요 ~ 어린이날도 일제강점기때 생겼고요~

  • @user-fj4rb9cq8d
    @user-fj4rb9cq8d11 ай бұрын

    무조건 반일만을 외친다면 시대를 역행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한미일 동맹이 결성됐을때 뉴스 기사에는 “대통령은 일본에게 굴복하는것이냐” 등의 댓글이 수두룩하더군요 피해자의 구도에서 벗어나서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모색하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8 сағат бұрын

    한미일 동맹이라니 국힘이 사과한 거 몰라요? 일본에게 우리가 얻을게 별로 없어요. 그들이 먼저 대가리 숙이는게 순서지. 시방 적자가 얼만데...

  • @soneva-291
    @soneva-291 Жыл бұрын

    치욕의 역사도, 수치의 역사도.. 모두다 역사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다음이 있습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ch8ij8yb7f
    @user-ch8ij8yb7f Жыл бұрын

    이 영상을 좌파가 싫어합니다

  • @user-zk3sz8wl1x
    @user-zk3sz8wl1x Жыл бұрын

    오늘날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모태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재산입니다 이를 창업주들이 헐값에 불하받아 덩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user-rf3oq9im1n

    @user-rf3oq9im1n

    Жыл бұрын

    과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진실입니다.

  • @user-un5kv2bo3e

    @user-un5kv2bo3e

    Ай бұрын

    어느 대기업인가요?

  • @user-bj9ml2ty7l

    @user-bj9ml2ty7l

    Ай бұрын

    @@user-un5kv2bo3e 왠만한 대기업들 전부 다지 6.25 끝나고 시작이였지만

  • @user-un5kv2bo3e

    @user-un5kv2bo3e

    Ай бұрын

    @@user-bj9ml2ty7l 어느 대기업이죠? 반말로 말고요.

  • @user-iq5dv7sw7g

    @user-iq5dv7sw7g

    Ай бұрын

    6.25끝나고 다밀렸는데 개소리지? ㅋㅋ

  • @zh0820-uj6bi
    @zh0820-uj6bi4 ай бұрын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일본이 국선변호사를 선임했다는건 참 충격적이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3 ай бұрын

    북한도 재판에 변호사 선임합니다.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요식행위라는 말을 아시오?

  • @gamdong259
    @gamdong259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는 너무 감정적이고 고집이 강해서 논리적인 토론이 매우 힘듭니다. 심지어 논리적으로 대화하는걸 정신적으로도 피곤해하고요 정신병자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 나라에서 이렇게 논리적인 영상이 나와서 좋네요. 감정적인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항상 하는 말이 있죠. 사실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어짜피 바뀌는게 없는데 뭐하러 그런걸 하나하나 따지고 바꾸려하나? 하루하루 사는게 바쁜데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뿐이지" 물론 틀린말은 아니지만 우리의것은 우리가 지켰으면 하네요. 더 늦기전에

  • @user-jf5pb4fb2o

    @user-jf5pb4fb2o

    Жыл бұрын

    😀

  • @user-kt8dr8sy7h

    @user-kt8dr8sy7h

    Жыл бұрын

    영상 초중반부터 우원재의 근거는 대부분이 거짓인 게 노비제도는 순조 시절에 폐지가 되기 시작했고 갑오개혁 때 와서는 사실상 문서상의 노비들일 뿐이다. 영상 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동족을 노예로 부린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었다고 우원재가 주장을 하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인데 유럽과 미국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인 등을 노예로 삼았고 우원재가 위대하다고 하는 일본제국도 1등 신민을 일본인 2등시마을 조선인으로 취급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 이렇게 좋았으니 좋게 말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 하는데 일본 제국는 전범국이다 당연히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한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만 한다. 동시대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패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므로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날에 차이나 머니로 대한민국도 중국으로부터 무역적으로 이득을 봤으니깐 중국에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겨우 몇 가지 긍정적인 것 때문에 일본의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Жыл бұрын

    논리? 1. 위생 근대화하면 저절로 고쳐짐 2. 교육 문맹80%

  • @winter413wind

    @winter413wind

    5 ай бұрын

    그건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지. 1945년 미국 덕분에 자유 인권 천황제 민주주의 헌법 국기 주권 영토 안보 인프라 경제 등등 다 받아서 현대화 선진국 되어서 1952년 미국이 지금의 일본을 건국해줬는데 일본은 아직도 히로시마 평화의 탑, 평화의 공원 따위의 것을 만들어서 원폭 피해자라고 반미 선동 반미 교육 국민들에게 세뇌시키잖아.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자 그럼 사실대로 말해보죠. 무역적자중 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My__hobby__room
    @My__hobby__room Жыл бұрын

    일본 강점기때 근현대화의 근간이 되는 의료복지사법체계 확립은 어떻게 보면 일본 입장에선 한국을 일본으로 완전히 흡수하기 이전에 하나씩 문제점을 손본다고 한것들이 결론적으로는 현재 한국이 성장할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거네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davidkim3529

    @davidkim3529

    29 күн бұрын

    못나서 식민지가 된 것이고 어찌됐든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개혁을 시도하였고 그 후 사람들 덩치가 커지고 조선인 판 검사가 나오고 주인한테 맞아 죽는 종이 없어지고 기본적 인권이 지켜지고 중국 미국 일본에 해외 취업도 하고.........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주 건강 인권 도전의 기회가 시스템상으로 기본적으로 깔릴게 되고 그렇게 변화가 오고.....일본은 후견국도 동맹국도 아닌 대륙 침략과 아시아 제패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국의 근대화로 인적 물적 기반을 강화시키려고 함. 사실은 사실대로 보면 됨.

  • @ul9511

    @ul9511

    10 күн бұрын

    에휴 ..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학계에서도 사장됬고 외국계 사학자들도 부정하는 .. 역사이론이아니라 정치이론인데 이걸 아직도 맏는사람이있네. 영상의 본질을 보세요. 과대해석 , 오버하지말고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user-wp7zb6lg5l 내 어머니의 기억을 듣자면 더 처참했습니다.

  • @smith4623
    @smith46234 ай бұрын

    조선은 당연히 망했어야 하는 국가였다. 어떻게 이딴 국가가 500년을 지속했는지 의문이 들뿐이다.

  • @jonesliam3246
    @jonesliam3246 Жыл бұрын

    역사는 선 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다각의 구도로 봐야하는 것이다

  • @leebynet
    @leebynet Жыл бұрын

    역사는 감정보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들이 모르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습니다.

  • @user-kt8dr8sy7h

    @user-kt8dr8sy7h

    Жыл бұрын

    영상 초중반부터 우원재의 근거는 대부분이 거짓인 게 노비제도는 순조 시절에 폐지가 되기 시작했고 갑오개혁 때 와서는 사실상 문서상의 노비들일 뿐이다. 영상 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동족을 노예로 부린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었다고 우원재가 주장을 하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인데 유럽과 미국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인 등을 노예로 삼았고 우원재가 위대하다고 하는 일본제국도 1등 신민을 일본인 2등시마을 조선인으로 취급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 이렇게 좋았으니 좋게 말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 하는데 일본 제국는 전범국이다 당연히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한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만 한다. 동시대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패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므로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날에 차이나 머니로 대한민국도 중국으로부터 무역적으로 이득을 봤으니깐 중국에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겨우 몇 가지 긍정적인 것 때문에 일본의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 @leebynet

    @leebynet

    Жыл бұрын

    @@user-kt8dr8sy7h 진짜 머리든거 없는 애가 애쓴다. 전범국은 6.25때 침략한 북한, 중국보고 전범국이라고 하는거다. 구한말때는 너같이 뇌없는 국뽕좀비들이 많아서 일본과 전쟁도 안하고 뺏긴거다. 그때 일본에 안뺏기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에 먹혔을 것이다. 조선말기에는 전국민의 60~70%가 노예였다. 자국민을 노예로 부린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경우다. 자국민을 노예로 삼았다고하는데 타민족을 노예로 삼은 다른 나라를 예시라고 드는 너는 머리가 장식품이냐? 그런 지능으로 밥은 제대로 처먹고 사냐?

  • @user-kt8dr8sy7h

    @user-kt8dr8sy7h

    Жыл бұрын

    @@leebynet 국뽕몰이개오지노ㅋㅋ 731운영하고 위안부운영한게 전범국이지 이승만 박정희도 일본이 전범국이라했는데 이분말씀은 틀린거냐?ㅋㅋ 틀니딱딱거리지말고 논리적으로생각해라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이분 말씀대로 사실대로 말해보겠습니다. 무역적자중 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bounce_way
    @bounce_way Жыл бұрын

    역사는 동화가 아니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뒤틀린 애국심이 아닌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역사에 대해 선악구도가 아니라, 공과를 있는 그대로 의논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길 바랍니다.

  • @user-jm7tk7vf3w
    @user-jm7tk7vf3w Жыл бұрын

    역사를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바라보는 날이 언젠간 오게되면 그때야말로 우리나라가 진짜 발전하는 날이 아닐까 기대해봅니다

  • @DC-jt7ye

    @DC-jt7ye

    Жыл бұрын

    그 말이 될려면 3차 세계대전 일어나야 함

  • @Diebestfussballspieler

    @Diebestfussballspieler

    Жыл бұрын

    박정희때가 그랫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 @user-ux4sc4ce4f

    @user-ux4sc4ce4f

    Жыл бұрын

    근데 이성적으로 볼려고 해도 일본이 하는 짓거리 보면 감성적으로 나오게 됨.

  • @Republicofchina.No.1

    @Republicofchina.No.1

    Жыл бұрын

    이성으로 바라보는 나라가 드물지않나 폴란드 우크라이나도 역사 감성으로 바라봄 얘넨 가해국이 일본처럼 거세당한 미국개된거도아니고 멀쩡히개짓거리하고다녀서 그런거도있지만

  • @user-gs3rj7ky6c

    @user-gs3rj7ky6c

    Жыл бұрын

    ​@@Republicofchina.No.1 폴란드는 자업자득면이 크긴하죠. 폴리투부터 2차대전 전에는 소련침공에 독일과의 마찰...

  • @fallenselfy
    @fallenselfy6 ай бұрын

    길바닥에 한국인 시신들이 널부러져서 시취가 너무 지독했다는 문헌도 같이 공유해주세요~

  • @davidkim3529

    @davidkim3529

    10 күн бұрын

    @@fallenselfy 언제? 어디에서? 왜? 감성팔이도 와꾸는 갖추어야지.......

  • @user-bf2hs8cq6c
    @user-bf2hs8cq6c11 ай бұрын

    이렇게 잘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면 지능이..

  • @user-si4zb8sb9l

    @user-si4zb8sb9l

    21 күн бұрын

    이런 선동에 홀라당 넘어가서 아무런 비판적 시각도 없이 전부다 수용해버리는 당신의 지능도 궁금하네요

  • @user-bf2hs8cq6c

    @user-bf2hs8cq6c

    21 күн бұрын

    @@user-si4zb8sb9l 어떤점이 문제가 있죠?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user-bf2hs8cq6c 이 영상엔 근거가 없음. 근거자료와 출처를 밝혀야지. 이 영상은 그냥 뉴라이트식 선동 맞음.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9 сағат бұрын

    @@user-bf2hs8cq6c 사건 하나하나 펙트체크를 해봐요. 댓글도 펙트체크 해보고. 지능이 있다면. 저 사람 말을 믿어야 하는 근거는?

  • @user-bv1qt4lq6f
    @user-bv1qt4lq6f8 ай бұрын

    6:54 초에 있는 한국교육 60년 논문 원본까지 가서 찾아보았지만 동일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몇 쪽에 저러한 내용이 나오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 @user-je3fl4rt5c

    @user-je3fl4rt5c

    5 ай бұрын

    동권의 21페이지부터 있는 내용입니다. 표 자체는 23페이지에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표만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실질적인 내용에는 양적인 증가와 별개로 고등교육 등이 한반도내 일본인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학교의 설립조차 총독부 자본이 아닌 민자에 의존적이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정말로 본 보고서를 읽고 이해했다면 상기 표의 인용은 지독하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해석입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러한 열등적 역사인식을 가진 것도 모자라 선동하고 퍼뜨리려고 하는지 의문입니다.

  • @user-qc5es4rm1p
    @user-qc5es4rm1p Жыл бұрын

    과거를 이용해 분노하기전 필요한 자기반성

  • @winter413wind

    @winter413wind

    Жыл бұрын

    일뽕 이라는 것은 친중 종북과 같은 정신병이고 국가를 위해서라면 최소 경계 최고 싸워야 한다. 좆서인 일뽕 집단의 말을 인용해본것.😗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8 сағат бұрын

    이런 영상 보고 분노하기 전에 전범깃발 휘날리며 우리바다를 활보하는 일본을 보며 해야할 자기반성.

  • @user-uz7mm2mq4t
    @user-uz7mm2mq4t Жыл бұрын

    돌 맞을 각오로 진실을 이야기한 영상에 응원을 보냅니다

  • @jayseonwoo8338

    @jayseonwoo8338

    Жыл бұрын

    진실을 외면하면 나라는 망한다.

  • @jayseonwoo8338

    @jayseonwoo8338

    Жыл бұрын

    비판과 문제점, 논리적은 근거들, 그리고 솔직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chiwoochi2834

    @chiwoochi2834

    Жыл бұрын

    돌맞을 각오가 아니라 돌을 처맞아야지 ㅋㅋ

  • @user-fo2dm3ez6y

    @user-fo2dm3ez6y

    Жыл бұрын

    하지만 돌을 맞아야겠죠?

  • @user-fo2dm3ez6y

    @user-fo2dm3ez6y

    Жыл бұрын

    조선 말기가 6.25직후보다 살기 좋았다 그럼 일제시대는 무슨 의미가 있지? 우리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사는 것이 역사에 있던 모든 길 덕분이라고 해도 우리가 잘 사는 것이 일제 덕분은 아니다. 6.25 이후 열심히 나라를 다시 세운 분들 덕분인 것이지.

  • @SamK-gw4pq
    @SamK-gw4pq10 ай бұрын

    반상을 해방시킨건 김일성이 아니라. 일정 식민지 기간이다. 북한이 해방시킨게 아니란거다.

  • @user-ct2rp3xl9s

    @user-ct2rp3xl9s

    9 ай бұрын

    그래서 찬양하는 일본은 왕실이 없나요? 우리도 일제 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왕실과 별개로 내각제로 공화정이 운영 되었을 겁니다. 일본 덕분에 대통령 공화제가 되었을까요? 천황을 모셨겠죠. 대통령제는 미국이 만든 제도 입니다.

  • @janlyyo1990
    @janlyyo19908 ай бұрын

    👍 퀄리티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user-zj7df4ls7q
    @user-zj7df4ls7q Жыл бұрын

    와.. 김구영상 보고 난 뒤에 이 영상을 2번째로 보고 바로 구독 박음. 사람이 진짜 성장하고 업그레이드 되는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또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 다음에 또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또 거기서 교훈을 얻고 성장해야하는데 힘이 있는 자들은 그 부분을 싹 덮어버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는 것. 그게 자신의 사리사욕. 자신에게 이점이 되는 조직들에게 이용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의 울타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 얼마나 죽어가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거지. 지도자나, 어떤 힘이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들 주위에 소통하고 아래로 컨트롤하고 다루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만약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대통령이라면 그 사람의 그릇이 얼마나 크고 지성인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있게 생각해야 하는데, 미화시키고, 선동하고 거짓된 것으로 자신의 추악한 뒷 모습을 가리려 하는 자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지 다른 이들을 같이 성장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짓밟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한 낱 비루한 인간일 뿐이지..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mbbdhhzb3893

    @mbbdhhzb3893

    4 ай бұрын

    다음영상에 있어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4 ай бұрын

    @@mbbdhhzb3893 우원재가 칭찬했던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으니 시진핑 정권이 살기 좋으니깐 시위를 안 하며 문재인 정권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급 시위가 없었고 윤석열의 지지율보다 높았으니 살기 좋은 시절이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없다. 심지어 그 논리대로라면 시위도 없고 김정은 지지율도 '공식적으로는' 99%인 북한은 진정한 지상락원이라는 결론입니다.

  • @user-li5ew5df9c

    @user-li5ew5df9c

    Ай бұрын

    ​@@user-km1sq5nx2d논점 흐리기용인게 너무 뻔해서 반박할 가치가 없음.. 지금 내용은 조선의 무능으로 나라를 뺏긴걸 말하고 있으나 영상에서도 말하듯이 철저히 피해자 주의로만 말하고 있는 도그마식 헛소리

  • @user-sp3nk2lx1l
    @user-sp3nk2lx1l Жыл бұрын

    이번 영상은 단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사실관계를 다루는 것을 넘어서 한 국가의 역사를 바라볼 때 실증적으로 접근해야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알린다고 생각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secondtonone4267
    @secondtonone426710 ай бұрын

    감정 90% 이성 10% 윤치호 선생의 통찰력이 맞다니깐 드라마나 영화나 그걸 이용해 먹으려는 정치인들...

  • @ki-ex4jw
    @ki-ex4jw Жыл бұрын

    좋은영상이네요 이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영상도 필요하죠 사실 일정 조선때에 수명도 인구도 두배이상 늘었죠 그런게 없었으면 제가 태어났을지?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Жыл бұрын

    30년 뒤에 두배? 그걸 믿어?

  • @user-dt2it8nu1f

    @user-dt2it8nu1f

    4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 정확히는 인구조사를 조선이 제대로 안해서 일본이 조사했을때 두배로 뻥튀기 될 수준이었던 것이죠

  • @user-si4zb8sb9l

    @user-si4zb8sb9l

    21 күн бұрын

    이 영상을 보고 어떻게 중립적이라는 말을 하시는지

  • @chojap6408
    @chojap6408 Жыл бұрын

    오랜만에 올라온 영상 잘 봤습니다. 항상 우리주변에 반일 이야기하는 분위기, 사람들이 많은데 분명한 증거와 사료로 반박하고 주장할수있는부분이 이 채널의 매력인거같습니다.

  • @user-pe9ib1is2w
    @user-pe9ib1is2w Жыл бұрын

    "불편한진실" 정말 적절한 단어네요 ㅎㅎ

  • @user-dj8is9cy2g
    @user-dj8is9cy2g5 ай бұрын

    우원재님! 731부대에 대해서도 다뤄주세요!!

  • @YoutubeKorea_No.1

    @YoutubeKorea_No.1

    Ай бұрын

    채널 특성상 그런 불편한 진실은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존차이나

    @존차이나

    Ай бұрын

    ​@@KZreadKorea_No.1 이채널은 불편한 진실을 국민에게 알려주는 채널인데요?

  • @Tddgcssg

    @Tddgcssg

    28 күн бұрын

    ​@@KZreadKorea_No.1 영상 안봤나

  • @난일본을사랑해

    @난일본을사랑해

    5 күн бұрын

    @@KZreadKorea_No.1 제목 못읽었노;;;

  • @user-lm1qw4kh6g
    @user-lm1qw4kh6g Жыл бұрын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려 주시네요

  • @user-he8ui1rq6w
    @user-he8ui1rq6w10 ай бұрын

    그게 의도적이였기보단 자기들이 집어 삼켜 살아갈 땅 이니 거기 살 일본 주민들이나 전체적 환경의 개선을 위해서였을테고 또 조선인들이 곧 일본인이다 생각하고 한거였을테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 신문물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식도 생기게 하는 등의 영향, 심지어 아주 큰 발전을 이루게 하는 영향을 주긴 했네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im5mu7tv5r
    @user-im5mu7tv5r Жыл бұрын

    이런 이야기를 제가 주변에 하면 공격당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데 극단적으로는 대인관계가 깨지거나 말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점점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기 일쑤이지요. 우원재님의 컨텐츠는 늘 논리적이고 차분한 전개로 설득력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극적이지 않게 잘 정리해주시고 저 대신 말씀해주셔서 반대견해를 가진 사람들이나 아직 생각조차 해본적 없는 이들에게 공유할 때 부담이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fp2bh5td7d

    @user-fp2bh5td7d

    Жыл бұрын

    저도 여럿 떠나보냈네요 김구가 공산당과 결착이 있었다고 말하니 저는 존재해선안될 또라이가 되잇엇음

  • @koreanchinese1836

    @koreanchinese1836

    Жыл бұрын

    @@user-fp2bh5td7d 전 휴대폰 배겸 화면에 김구랑 태극기 광복군 있는 친구에게 김구의 실체 광복군 복장이 중공군 비슷...머 이런 이야기 했는데 그 뒤는 이야기 안하겠습니다 ㅋㅋㅋ

  • @user-fp2bh5td7d

    @user-fp2bh5td7d

    Жыл бұрын

    @@koreanchinese1836 남한에서 역사는 교육과정, 과거탐색 이 이상임.. 관념지배, 인식세뇌 그자체에요 혐오와 긍지 등의 감성밖에 안차서 현실,직설을 거북해하는 감성편향적 사고방식이 조성됨 이런 사고방식이 여론의 주를 이루니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고 믿고싶은게 곧 사실이 되어버림.. 강조하지만 여기 역사는 역사 외 모든 사고방식 자체에도 생각 자체를 피해의식과 집단감성으로 감정적이고 편향스럽게 바꿔놓는 수단과도 같음.. 아이돌 마녀사냥.. 광우병.. 성을금기시.. 페미.. 여혐.. 죽으면위인화.. 역사교육이 이나라 여론의 고질적인 문제들의 근원점이라고 헤도 과언이 아님

  • @Cuteness-is-justice

    @Cuteness-is-justice

    Жыл бұрын

    @@user-fp2bh5td7d 공산주의와 그 산하인 사회주의의 악마화도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선진제도인 수정자본주의 적용에는 공산주의적 접근또한 거의 필수적일텐데 말이죠.

  • @Hyunduk_Yu

    @Hyunduk_Yu

    Жыл бұрын

    @@Cuteness-is-justice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암암리 활동 중인 주사파, 김일성주의자들과 좌파를 가장한 날조 선동꾼들입니다. 대충 민주당, 노조 연합과 그 관련자들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습니다. 국힘당이라고 해서 다 잘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님. 아무튼 자칭 좌파 측은 선동 능력이 탁월하여 거짓 사실을 바탕으로(병풍 사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이 되도록 만들었고, 불합리하게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 내렸으며, 댓글 조작 등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합리, 자유주의, 법치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파는 선동을 잘 못 하여 번번이 밀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악마화가 어느 정도 부당한 것이 있을지라도 일단 나라부터 살려 놓고 차차 따져봐야 할 것으로 생각함. 그리고 사실 한국에 제대로 된 좌파(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있음. 내가 봤을 때 민주당은 좌파라기 보다는 선동 모리배, 포퓰리스트에 가까움.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깡패 왕족 국가이므로, 이를 따르는 주사파도 제대로 된 좌파가 아님. 진중권 교수 정도는 좌파가 맞다고 생각함.

  • @user-hy9xm8ji6z
    @user-hy9xm8ji6z Жыл бұрын

    통탄스러운 건 아무리 논리정연하게 자료를 준비하고 설명을 해도 듣는 이, 보는 이가 아예 타인의 의견을 듣고 자기 주관하에 시비를 가리고 해야 되는 것인데,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의지가 티끌이라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무시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게 지금의 세대에 와서도 적지않은 수의 이들이 존재한다는 게 슬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료들은 계속 만들어져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자 반박해보십시오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user-wp7zb6lg5l 이 들은 이런 글 불편해 합니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노비에 대한 정보만 찾아 봤는데 새빨간 거짓 입니다. 중국은 1910에나 노비제를 폐지했고 일본은 20세기 초까지도 동남아에 매춘부를 판 기록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원출처는 Junius Rodriguez라는 학자가 1997년에 편찬한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입니다. 이런 글도 있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지극히 대식가라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들은 배고픔을 만족시키려고 먹는 것이 아니라 포만감을 즐기려고 먹는다. .. 이처럼 포식을 선호하는 것은 모든 계층에서 똑 같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8, 제12장) 조선 사람은 색다른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닮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보다 더 멋있어 보이며 일본인보다 체격이 더 좋다. 비록 그들의 평균 신장이 겨우 5 피트 4.5 인치이지만, 흰색 옷은 몸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고, 언제나 쓰고 있는 높은 왕관 장식의 모자는 키를 더 커 보이게 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898, 제1장) (나 - 시대를 생각하면 164정도가 그렇게 작은 키 같지 않았네요.) 작은 사례를 가지고 일반화하는 오류도 있습니다. 사망 연령도 어린 아이 때 죽는 비율이 높아 상대적으로 낮은 듯 합니다. 역사에 관심조차 없어 드라마도 안보는 내가 이런 것 까지 찾아봐야 하는 것은 교묘하게 곡학아세하는 이따위 영상을 믿는 자들이 넘쳐 나길래 억지로 찾아 봤습니다. 덮어놓고 믿지말고 검색은 하고 살자!! 이 영상 제작자의 모든 영상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영상들 대충 훏어봤고 편협된 영상들 이길래 더 이상 이 제작자의 영상은 시청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간이 아깝습니다.

  • @user-kt9pl9zd3y
    @user-kt9pl9zd3y Жыл бұрын

    훌륭하십니다. 좋은 정보!

  • @user-lq9vw9nj8i
    @user-lq9vw9nj8i6 ай бұрын

    형님 영상을 보며 내가 알고 있던 정보와 너무 달라 혼란스럽지만 혹시 내가 정말 세뇌되어왔고 틀렸던걸까 싶습니다...

  • @user-hz9vh6gq3z
    @user-hz9vh6gq3z Жыл бұрын

    진짜 이게 애국이라는걸 느낍니다 그리고 선과 악으로 구분지어 속아온 역사교육에 한탄을 느낍니다. 이러한 내용들 모두 기억하고 전달하며 옳바른 인식과 생각을 위해 한번쯤은 용기를 가져보겠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이딴 극우 영상 쳐보고 애국이라는 말 입에 올리지 마라…

  • @jgh5103
    @jgh5103 Жыл бұрын

    진짜 이런 영상이 왜 방송3사에서 안가져가고 다큐로 안만들어지는거냐 진짜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 @ATELLASDREADNOUGH9865
    @ATELLASDREADNOUGH98659 ай бұрын

    물론 좋은건 있지만 무조건 너내가 이렇게 좋아진건 우리가 그렇게 한거다. 라고 말하기에는...엄연히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는 것은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 @mensa2030
    @mensa203010 ай бұрын

    진짜 일본이조선 먹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시민의식이라도 있었을까 싶은데... 저런 조선을 독립하겠다고 싸웠다니.. 양심이라도 있나 싶네

  • @user-hr3fo5tc9u
    @user-hr3fo5tc9u Жыл бұрын

    퀄리티가 정말 최고입니다 만드시느라 모두 고생하셨겠어요❤

  • @zxmncbvcx

    @zxmncbvcx

    Жыл бұрын

    동영상 올리신 분이 친일파의 후손이라 이거 감추려고 이런 영상 올린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일본이 일제강점기로 욕쳐먹는 이유는 일본으로 인해 한국 국민이 잘 먹고 잘 살았다? 가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을 고문시키고 산채로 실험하고 죽이고 위안부까지 만든 만행이어서 인데 이거 동영상 만드신분 무슨 의도로 이런 영상 만드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호밀밭의 ???님은 (본명도 우원재 아니신거 같은데) 잘먹고 잘살게 해주면 댁 부모님과 자식들 위안부나 생체실험 허락하실건가요? 그래도 일본덕에 이리 잘사는거다 이런 논리의 동영상 만드실건가요?

  • @dolgum826

    @dolgum826

    Жыл бұрын

    콸러티

  • @user-kt8dr8sy7h

    @user-kt8dr8sy7h

    Жыл бұрын

    영상 초중반부터 우원재의 근거는 대부분이 거짓인 게 노비제도는 순조 시절에 폐지가 되기 시작했고 갑오개혁 때 와서는 사실상 문서상의 노비들일 뿐이다. 영상 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동족을 노예로 부린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었다고 우원재가 주장을 하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인데 유럽과 미국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인 등을 노예로 삼았고 우원재가 위대하다고 하는 일본제국도 1등 신민을 일본인 2등시마을 조선인으로 취급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 이렇게 좋았으니 좋게 말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 하는데 일본 제국는 전범국이다 당연히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한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만 한다. 동시대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패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므로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날에 차이나 머니로 대한민국도 중국으로부터 무역적으로 이득을 봤으니깐 중국에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겨우 몇 가지 긍정적인 것 때문에 일본의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 @LFD-ls7li
    @LFD-ls7li Жыл бұрын

    그동안 정치적인 이유로 수십년간 공적으로 사적으로 이뤄진 민족적 가스라이팅의 산물이죠 말씀하신대로 역사는 담백하게 흘러간 팩트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 공과 과를 평가하여 미래로 나아가야죠 정말 보물같은 영상입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yv7lm5wm7k

    @user-yv7lm5wm7k

    5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그럼 우리나라는 언제 누구에 의해 근대화가 된건가요?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나라 뺏긴 이후론 거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의지로 할 수 있었던게 없지 않았나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5 ай бұрын

    @@user-yv7lm5wm7k 한강의 기적입니다.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 맞는 말씀이십니다.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user-yv7lm5wm7k 한국전쟁 이후 우리 지식인들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제원조와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정책 때문이죠, 하지만 윗분이 말씀하신것처럼 일본이 조선의 자주적 경제성장을 할 수있는 권리를 박탈해서 근대화를 못한것도 큽니다.

  • @user-jc8dd7fg4u
    @user-jc8dd7fg4u6 ай бұрын

    좋은영상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워갑니다..!

  • @user-do2wk5rx4e
    @user-do2wk5rx4eАй бұрын

    나는 보수쪽에 가까운데 단순히 개별적인 지표를 가지고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거는 잘못됐음 예를들면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 증가분보다 일본으로 수출량 증가분이 더 많았음 그게 일본의 초기 목표였기 때문에 그러면 쌀을 가져가려고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의 보급로를 뚫고 철도공사한것도 -에서 +로 갔으니 일본에게 고마워 해야하나? 이것도 우리나라를 개발해준거니까? 우리가 한글쓰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땅을 밟고 있는거는 일본 덕분 이 아니라 일제가 망한 덕분이임 우리나라를 꿀꺽하려고 판을 벌린 그 위에 올라섰던것 뿐임 당시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댓글들은 너무 일본을 옹호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댓글을 달아봄 이 사람이 반박했듯이 이 유튜버의 말도 다 맞는것이 아니고 내 말도 마찬가지임 한쪽말만 듣고 생각하지말고 밑에 있는 다른의견을 가진 댓글들도 보기바랍니다

  • @guraud2024

    @guraud2024

    Ай бұрын

    일본의 의도가 어떻든 도움을 준건 팩트이고 조선은 일본이 식민지로 삼지 않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의 먹잇감일 뿐임 일본의 의도가 ~ 라서 ~~ 하며 역사에 감정을 담기 보다는 팩트는 팩트로 받아들이시는게 역사를 보는 좋은 관점이라 저는 생각함

  • @감이

    @감이

    Ай бұрын

    한국 역사는 믿지 않는게 좋음 해외쪽 자료들이라도 자기가 직접 찾아서 공부하는 쪽이 더 도움된다

  • @user-yf9ch8vj8o

    @user-yf9ch8vj8o

    28 күн бұрын

    쌀을 훔쳐간게 아닌데. 훔쳐간다면 그 다음해에 농사를 안짓지. 더 비싼값으로 구매해주니 생산자 입장에선 좋은거지. 글고 조선시대 한글과 지금 한글은 달라. 지금같은 글자 문법 맞춤법도 일제시대때 완성된것. (맹그러노코) ..(만들어놓고) 이런식임. 일본이 조선의 역사를 잊어선 안된단 취지로 한글 교육을 허락한건 아님. 이거 막으면 조선인 반발 심해지니 어지간한건 다 허용해줌. 반란이나 독립운동만 안하면 냅둠그냥

  • @user-cc2kw4fr3t

    @user-cc2kw4fr3t

    26 күн бұрын

    "단순히 개별적인 지표를 가지고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거는 잘못됐음" ㅇㅈㄹ하고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니가 한 말 다시 한 번 읽어 봐봐

  • @user-gtyhgdsqdcbj

    @user-gtyhgdsqdcbj

    22 күн бұрын

    @@user-cc2kw4fr3t결과만 보지말고, 의도도 봐야한다는 뜻이잖아.

  • @user-re6kf4gv9y
    @user-re6kf4gv9y Жыл бұрын

    우와 환영합니다 이나라에 이런분이 계셨다니 고맙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미화 할필요도업지만 진실을 가려서는안됩니다 정말 조은 글 잘읽었습니다 우원재님 꼭 기억 하겠습니다

  • @user-pc2eg9rj5r

    @user-pc2eg9rj5r

    Жыл бұрын

    니혼징데쓰? 업지만(X) 없지만(O) 조은(X) 좋은(O) 공부하세요~

  • @thishope

    @thishope

    Жыл бұрын

    영상이 인상깊으셨다면 채널의 미니다큐 : 친일파 이완용의 변명 영상도 추천드립니다 ㅎㅎ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hyunhuni1146
    @hyunhuni1146 Жыл бұрын

    좋은담론으로 지성의길을 찾아주는콘텐츠 감사드려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kud4799
    @kud4799 Жыл бұрын

    감성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user-kt8dr8sy7h

    @user-kt8dr8sy7h

    Жыл бұрын

    영상 초중반부터 우원재의 근거는 대부분이 거짓인 게 노비제도는 순조 시절에 폐지가 되기 시작했고 갑오개혁 때 와서는 사실상 문서상의 노비들일 뿐이다. 영상 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동족을 노예로 부린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었다고 우원재가 주장을 하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인데 유럽과 미국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인 등을 노예로 삼았고 우원재가 위대하다고 하는 일본제국도 1등 신민을 일본인 2등시마을 조선인으로 취급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 이렇게 좋았으니 좋게 말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 하는데 일본 제국는 전범국이다 당연히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한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만 한다. 동시대인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대패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므로 그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날에 차이나 머니로 대한민국도 중국으로부터 무역적으로 이득을 봤으니깐 중국에 불편함을 느끼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겨우 몇 가지 긍정적인 것 때문에 일본의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없어지지 않는다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감성이 곧 현실이 되는데 이나라에서 둘을 나눠봤자 무슨소용

  • @user-if3zk9nx8x
    @user-if3zk9nx8x8 ай бұрын

    6:50 기초교육은 받을 수 있게 해줬지만 고등,대학교와 같은 교육은 받지 못하게한 것등을 설명해주셨으면 어떨까 생각이드네요 다른 정보들도 마찬가지구요

  • @user-no3yw1uu7j
    @user-no3yw1uu7j10 ай бұрын

    진짜 존나게 불편하지만 존나게 알아야 할 사실

  • @fhzptqnfrndl
    @fhzptqnfrndl Жыл бұрын

    누군가 이 영상을 보고 일제강점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한 것들에 혼란을 느끼신다면 해당 자료들의 출처를 다 찾아서 들어가보세요. 그것도 모자라다 싶으면 관련된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스스로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fhzptqnfrndl

    @fhzptqnfrndl

    7 ай бұрын

    위생관념에 대해서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 시기에 따라 인식이 개선되어왔나보네요. 근데 한국전쟁 이후로 차 한 대 만드는 기술이 수십 년 소요됐을 정도로 현대화가 하나도 되지 않았을 리는 없죠. 전쟁이 시작하던 시기만 해도 전차가 있을 미국 기술을 하나도 얻지 않았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첫 문단에서 말씀하신 일제가 조선에게 행한 만행들 대부분은 나라가 단지 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침략하기도 전에 조선이 얼마나 부패했고 국력도 없었는지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일제가 조선인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지만 인간도 아닌 재산 취급 받았던 노비 입장에서는 그나마 시민 대우는 받았었지요. 단순히 민족을 지배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조선인 아이들에게 학교를 보냈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럼 주권을 빼앗았을 때 얼마나 조선에 심하게 한 건지, 얼마까지 우리나라에게 인도적으로 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그 선에 대해 정확한 개념도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옳겠죠. 의견 잘 읽었습니다. 좀 더 생각하고 배운 기회였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fhzptqnfrndl 노비제는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학교보냈지만 명분이고 문맹률 80%

  • @user-je3fl4rt5c

    @user-je3fl4rt5c

    5 ай бұрын

    @@fhzptqnfrndl 두번째 문단을 읽으니 가슴이 턱막힙니다. 근거에 믿음으로 반박하시는 모습이 이미 하나의 관점에 상당히 매료되신 듯 보입니다. 위 영상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만하지 온통 왜곡된 역사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영상에서 진실을 호도하는 방법으로 의도와 결과의 인과를 역전시키는 것과 통계를 교묘하게 해석하여 관련 없는 사실과 연결짓는 전략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예시는 위 정보를 혹 믿을 분들이 계실사 영상의 댓글로 남겼으니 최신순 정렬하여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추가로 저는 직접 통계자료를 찾아보라 하셔서 선생님께서도 직접 찾아보시고 댓글을 작성한줄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영상에 인용된 자료의 출처에서는 영상의 주장과 완전히 상반되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기 댓글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예시를 남깁니다. 6분 50초 쯤에 나오는 한국교육평가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교육시설의 양적 증가가 있었다 할 수 있으나 특히 고등교육기관의 경우 한반도내 일본인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학교 설립에 총독부의 예산이 아닌 민자에 대부분 의존하였기에 우리민족의 교육수준 향상에 식민통치의 기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위 영상이 어떤 대단한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빨간약이라는 믿음은 어떤 시청자분들에게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맹목적이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비단 식민지 근대화론만이 아니라 인터넷 세상에 만연한 무근본 날조와 선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디, 부디 비판적 시선으로 무장하여 스스로를 지키시길 당부드립니다.

  • @user-do2wk5rx4e

    @user-do2wk5rx4e

    Ай бұрын

    ​@@fhzptqnfrndl​ 1차교육령으로 조선인은 고등 교육을 배우지 못함 당시 3.1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 반일 감정이 엄청났고 이에 대응해서 일제가 문화통치+ 2차교육령으로 (민립대학운동을 억제하려 지은게 경성제국대학임) 완화정책을 펼침 그러나 일제가 주도하는 교육을 가르침 2차도 마찬가지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기조는 1차와 동일함 당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보여주기 식이였음 이 유튜버 말이 모두 정답은 아닙니다

  • @coe3041
    @coe3041 Жыл бұрын

    한국인들은 감정적으로 배운 역사만 기억할뿐 차가운 역사적 팩트를 배우는 법을 안배웠기 때문에 이런 영상이 많이 퍼져나갔으면 좋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 @joodiego

    @joodiego

    Жыл бұрын

    감성적 사고만 교육하고 비판적사고를 교육인하는 나라

  • @user-dp3ip5fb6e

    @user-dp3ip5fb6e

    Жыл бұрын

    뉴스 댓글창 보면 일본 얘기만 나오면 급발진함 ㄹㅇ 발작버튼이 모공개수인듯

  • @AS-mk6bb

    @AS-mk6bb

    Жыл бұрын

    @@user-dp3ip5fb6e 특히 욱일기가 ㄹㅇ 발작버튼

  • @hoo3072

    @hoo3072

    Жыл бұрын

    @@AS-mk6bb 욱일기는 잘못된 거 맞는데?? 유럽에서 나치깃발 사용하는 거랑 똑같은 건데 무슨 그걸 감싸는 듯이 말하노 ㅋㅋ

  • @AS-mk6bb

    @AS-mk6bb

    Жыл бұрын

    @@hoo3072 그럼 조선총독부나 헌병대에서 자신들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했었고, 정식 일본제국 국기이기도 했던 일장기에도 똑같이 반응해야지 그럼 인정한다. 그리고 요즘은 살짝 나아진 것 같다만 일본제국과 전혀 관련없는 매체에서도 욱일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문양이 나왔다 하면 발광을 하는게 현실인데 ㅋㅋ

  • @user-ue2yc7hg7f
    @user-ue2yc7hg7f Жыл бұрын

    더빨리 망하지않은게 이상하지.

  • @user-vo5ju8kn3i
    @user-vo5ju8kn3i5 ай бұры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 사실들이 불편하게 느껴지신다면, 이제는 왜 그럴까 고민을 해볼 때입니다."

  • @admiralblue9324
    @admiralblue932410 ай бұрын

    아주 훌륭한 영상입니다. 감사합니다.

  • @S_TRA
    @S_TRA Жыл бұрын

    대체 이런 자료는 어디서 찾으시는겁니까 ㄷㄷㄷ

  • @user-qc5es4rm1p
    @user-qc5es4rm1p Жыл бұрын

    항상 멋진영상 감사합니다!

  • @user-jd8gu1iq5k
    @user-jd8gu1iq5k6 ай бұрын

    좋은내용입니다

  • @younge3502
    @younge3502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역시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고 고치는게 맞죠. 그냥 단순히 일제가 침략했으니깐 일본만 무작정 욕하기 보다는 ( 일제 침략은 정말 잘못되었지만) 일제에 쉽게 침략을 당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부패한 왕가와 관리직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게 맞겠네요. 영상을 통해 알게된 구한말 조선의 상황이 제가 알고있는 사실보다 많이 심각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받았네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성장했다는 사실도 참 불편하지만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러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되풀이 하는 것 처럼 현재 한국에 부패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 @ranfunkkim4612

    @ranfunkkim4612

    Жыл бұрын

    일본이 큰것도 백제인데 죽어도 인정안해요 같은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왕가도 백제인이라고..지금의 천왕 피가 백제의 후손...

  • @user-jm4nw7fd2z
    @user-jm4nw7fd2z Жыл бұрын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구하시는건가요? 찾기 어렵던데. 인터넷에 있는건가요? 어찌됬든 이 나라의 역사관과 상당히 대치되니 흥미롭긴 합니다.

  • @thishope

    @thishope

    Жыл бұрын

    참고자료는 모두 우측하단과 영상 클로징에 정리되어있습니다 ㅎㅎ

  • @user-tw4xn7dy6i
    @user-tw4xn7dy6i9 ай бұрын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농사를 짓고 사셨는데. 일본인들이 질병 교육이나 여러 교육에 참가 하라고 하셨데요. 까만눈에 농사만 짓는데 참가하기 어렵다고 이야기 했으나 강제로 끌려가 교육을 듣고 교육을 이해 못하면 압박하고 강압적인 질타 간섭도 많았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지금이야 지원 혜택이 있지만 아는 사람만 알고 공무원들도 직접 방문해서 도와주는 일이 드물죠. 이 내용이 지금 제가 볼 땐 뭐 하긴 했네 부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때 시대에서는 상당히 괴리감 있고 강제로 시키는데로 해야 했던 시절이란 생각도 들어요.

  • @leonardodicaprio4561
    @leonardodicaprio4561 Жыл бұрын

    정말 좋은 채널이네요 사람들은 흔히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 선과 악은 혼재되어있고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는 악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좋은 점도 조금은 섞여있었다 이렇게 보는게 맞지 않나 싶네요

  • @user-tq6nb8nk7m
    @user-tq6nb8nk7m Жыл бұрын

    환갑을 넘긴지 꽤 된 할배입니다 젋은분이 어찌 이리 명석하고 이지적인지 놀랄뿐입니다 이런 젋은분들이 있어서 나라의 미래가 희망적입니다 우원재님 하시는 일에 늘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 @zxmncbvcx

    @zxmncbvcx

    Жыл бұрын

    동영상 올리신 분이 친일파의 후손이라 이거 감추려고 이런 영상 올린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일본이 일제강점기로 욕쳐먹는 이유는 일본으로 인해 한국 국민이 잘 먹고 잘 살았다? 가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을 고문시키고 산채로 실험하고 죽이고 위안부까지 만든 만행이어서 인데 이거 동영상 만드신분 무슨 의도로 이런 영상 만드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호밀밭의 ???님은 (본명도 우원재 아니신거 같은데) 잘먹고 잘살게 해주면 댁 부모님과 자식들 위안부나 생체실험 허락하실건가요? 그래도 일본덕에 이리 잘사는거다 이런 논리의 동영상 만드실건가요?

  • @zxmncbvcx

    @zxmncbvcx

    Жыл бұрын

    논리적인 척 하나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일본편향적으로 만든 동영상. 일제강점기가 왜 욕먹는지 동영상제작자님은 정녕 모르시느건가? 요즘에 유튜버들 마음에 안드는 댓글 삭제처리해서 여론조성 하는데 이 댓글 삭제하지말고 놔두셨으면 합니다. 밑에 쓴 댓글까지 해서요.

  • @user-ii6xx7tr9h

    @user-ii6xx7tr9h

    Жыл бұрын

    @@zxmncbvcx 왜 이런 민족주의적인 분이 아디는 영어를 ,

  • @zxmncbvcx

    @zxmncbvcx

    Жыл бұрын

    @@user-ii6xx7tr9h 너는 시팔 외국 한국 논리없이 구분해야되냐? 너 왜 한국어쓰냐?

  • @user-ii6xx7tr9h

    @user-ii6xx7tr9h

    Жыл бұрын

    @@zxmncbvcx 이거 띨하네, 니같은 민족주의자가 아디는 꼬부랑 글 쓰냐니까 나한테 한글은 왜쓰냐하네 생각이 범벅같은게.

  • @park32304
    @park32304 Жыл бұрын

    이런영상이 교육영상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네요.. 정말 한국사강사 및 교사들이 봤으면 합니다 갑오개혁조차도 김홍집내각을 강조하면서 마치 조선이 한 것처럼요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 을사늑약등 완전 일본의 증오심만 부각시키죠 명성황후, 고종의 분노심은 전혀없구요 정말 심각합니다..

  • @user-fp2bh5td7d

    @user-fp2bh5td7d

    Жыл бұрын

    민족편향 감성편향 교육편향 혐오편향 긍지편향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이영상은 근거가 없는데 무슨? 그냥 친일하는 자들이나 보면 될 듯. 그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니까.

  • @user-fo6rr9wf4r
    @user-fo6rr9wf4r Жыл бұрын

    따근따근한 편집 영상이네요

  • @lenananajj9864
    @lenananajj9864 Жыл бұрын

    객관적 사실과 있는그대로의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그래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jeonghwanshin4710
    @jeonghwanshin4710 Жыл бұрын

    다만 생각해볼점은 당시 의학의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고 비료개발 등의 과학발전이 엄청 빠르던 시기였다는 것.

  • @user-rf1ve8pg7k
    @user-rf1ve8pg7k Жыл бұрын

    불편한 것일 수록 진실에 가깝다.

  • @user-rf1ve8pg7k

    @user-rf1ve8pg7k

    Жыл бұрын

    @헿헤 너도 야 나두.

  • @djh4092
    @djh4092 Жыл бұрын

    무지성으로 깔게 아니라 이런 객관적인 역사는 알아두는게 좋음

  • @postpone777
    @postpone777Ай бұрын

    일본이 조선에 나쁜짓도 많이 했지만 의외로 좋은일도 많이 했음. 우리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정확히 가르칠 의무가 있음. 개인적으로 일제의 최고의 치적은 신분제 폐지라고 생각함. 그게 없었다면 인도 마냥 지금도 신분제 비슷한게 있어 천민 출신은 법관을 못한다는둥의 차별이 있었을거라 생각함. 신분철폐때 기득세력이었던 양반들이 강력 반발 했던걸 생각하면 혁명없이 조선 스스로 신분개혁을 했을 가능성은 낮음.

  • @user-zm8vb3gv1l
    @user-zm8vb3gv1l6 ай бұрын

    위안부도 다뤄주세요~

  • @user-sn3jc9rr2b
    @user-sn3jc9rr2b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 제작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상을 보고 동참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 @DavidLee-sb8dz
    @DavidLee-sb8dz Жыл бұрын

    와.... 영상 퀄리티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공교육에서도 영상내용처럼 '팩트에' 기반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교육했으면 좋겠습니다! 원재님 존경합니다 진짜

  • @user-bi5vh2qm8m

    @user-bi5vh2qm8m

    Жыл бұрын

    학교 공교육 망칠 일 있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가 보고 싶은 사실만 보는게 팩트임? 사기쳐서 1억을 번 사람한테 수고했다고 할거임?????

  • @dorrage2580

    @dorrage2580

    Жыл бұрын

    @@user-lo6pv9hk3w 지가 보여주고 싶은것만 보여주는게 팩트? ㅋㅋㅋ 저따구로 만들면 아프리카 식민지 학살도 미화할수있지

  • @zxmncbvcx

    @zxmncbvcx

    Жыл бұрын

    동영상 올리신 분이 친일파의 후손이라 이거 감추려고 이런 영상 올린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일본이 일제강점기로 욕쳐먹는 이유는 일본으로 인해 한국 국민이 잘 먹고 잘 살았다? 가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을 고문시키고 산채로 실험하고 죽이고 위안부까지 만든 만행이어서 인데 이거 동영상 만드신분 무슨 의도로 이런 영상 만드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호밀밭의 ???님은 (본명도 우원재 아니신거 같은데) 잘먹고 잘살게 해주면 댁 부모님과 자식들 위안부나 생체실험 허락하실건가요? 그래도 일본덕에 이리 잘사는거다 이런 논리의 동영상 만드실건가요?

  • @user-yj5nn3nj8h

    @user-yj5nn3nj8h

    Жыл бұрын

    @@user-lo6pv9hk3w 근대화에 기여? ㅇㅇ 맞지 근데 가배가 뭔진 알아? 커피의 일본식 발음임. 근대화를 맞이하면서 호텔과 양장 가배 등 신문물이 들어왔지만 그건 다 일본인을 위한 문화상품이였음. 농민들이나 일반 조선 상민이 저런걸 누렸으면 근대화에 기여한게 맞는말이겠지만 일본인만 누린 문화상품이였다고. 그냥 조선은 일본한테 돈벌이 수단이고 넓은 땅, 노예일 뿐이였던거

  • @user-uo4uc3cf8m

    @user-uo4uc3cf8m

    Жыл бұрын

    @@dorrage2580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의 악행을 매우 잘 알고있어서 그 부분은 생략한듯합니다 모르면 수업시간에 졸았던거로 설마 외국인들이 이걸 볼까요?

  • @user-iy5jl8hp6v
    @user-iy5jl8hp6v10 ай бұрын

    메시지에 반박하지 못하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 @user-hp6vb3tg8x
    @user-hp6vb3tg8x6 ай бұрын

    평소엔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 많이 알아갑니다 ㅠㅠ!! 학교에서 배웠던 근현대사는 과연 거의 다 거짓일까 누군가의 관점일 뿐이였을까? 라는 생각에 많이 혼란스러워요 과연 그 시대의 승자가 정리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믿어도 될까..? 라는 의구심도 들고요ㅠㅠㅠ 누구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기록들을 남기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게 팩튼가..?하는 생각 때문에 더 머리가 아픕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Johndoe-mq8er
    @Johndoe-mq8er Жыл бұрын

    마지막 멘트가 많이 와 닿네요. 불편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lq3ws7xo2n
    @user-lq3ws7xo2n Жыл бұрын

    이러한 내용이 교과서에 들어가야 합니다.

  • @user-uo4uc3cf8m

    @user-uo4uc3cf8m

    Жыл бұрын

    고등교육 정도는 되어야 할듯? 넣는김에 제1~5 공화국의 대참사들도 넣는걸로 조선민족의 역사(희망편):초1에서 중2 1학기 조선민족의 역사(절망편):중2 2학기 에서 고3

  • @user-lq3ws7xo2n

    @user-lq3ws7xo2n

    Жыл бұрын

    @@user-uo4uc3cf8m 대참사도 있지만 대약진도 있었으니 모두 들어가야죠^^. 그리고 순서가 잘못된거 같아요. 조선 말기부터이니 (절망편--->희망편) 으로 편집하는게 좋겠네요

  • @user-gh6rj2tn5p

    @user-gh6rj2tn5p

    7 ай бұрын

    교과서 못들어감. 세뇌만이 그 선동 세력의 유일한 정치적 도구이기에... 5.18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모셔둔 것과 일맥상통 함.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bikenshishido1628
    @bikenshishido1628Ай бұрын

    뒷통수 쎄게 맞은 느낌입니다..구독박습니다

  • @user-zb1lq4mi5i
    @user-zb1lq4mi5iАй бұрын

    강제징용,강제 노동력 착취,위안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런 주장을 펼치는거는 의도가 다분히 보입니다..

  • @YcKim-yc4pn

    @YcKim-yc4pn

    Күн бұрын

    자신이 세뇌되어 왔던 선과 악의 개념들이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제 남아있는 자신의 착각에 대해 의심해봐야 할 때입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를 제외하면 일본인만 강제 징용하고 조선인은 참전시켜주지도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위안부들은 당국이 고액의 페이를 보장해줬기 때문에 자원 근무가 기본이었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피해자들이 있었다면 그건 브로커들한테 사기를 당한거겠죠. 식민지 국가한테 어떻게 그렇게 공평할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드는게 정상입니다만 영상에 나와있는 팩트들만 봐도 일본이라는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수 있지 않습니까? 이쯤돼면 저는 망해가는 좀비기업을 인수해서 회생시켜준거라 봅니다.

  • @user-lx8br3vg5o
    @user-lx8br3vg5o Жыл бұрын

    이 영상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 @user-xq3os7cf7n

    @user-xq3os7cf7n

    Жыл бұрын

    이영상을 민주당좌파들이 싫어합니다

  • @user-pb8sq7lb1d

    @user-pb8sq7lb1d

    Жыл бұрын

    좀더 열심히공부하세요.일제강점기의 팩트는 영화 “귀향”, “군함도“를 잘 보세요.

  • @user-ru4xw7is5x

    @user-ru4xw7is5x

    5 ай бұрын

    ​@@user-pb8sq7lb1d 왜 역사를 영화나 유튜브로 배워야 합니까?

  • @user-ft7zs4pi7k

    @user-ft7zs4pi7k

    2 ай бұрын

    제말도 널리 퍼졌으면.. 무역적자중 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lr2xm7ri3f
    @user-lr2xm7ri3f Жыл бұрын

    그 시대를 꿈꾸는 이재명과 잔당들이 우리나라 주요세력입니다

  • @factchecker81
    @factchecker815 ай бұрын

    영상 잘 보았습니다.

  • @user-zd3ou9ee8o
    @user-zd3ou9ee8o Жыл бұрын

    내가 알고 있던게 부정당하는 느낌이 이런건가...

  • @weightlossishard
    @weightlossishard Жыл бұрын

    수고하셨습니다

  • @azure1501
    @azure1501 Жыл бұрын

    일제강점기를 절대악으로만 보지말고 그 속에서 발전했던 것에 대해서도 연구가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시대가 오길 바래봅니다

  • @jaemayham

    @jaemayham

    Жыл бұрын

    당연히 잘못된 것은 짚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절대악이 아니라 필요한 곳은 묻어버리지 않고 연구가 필요하다. 임 '일뽕' 댓글이 아니라 개선점을 짚는거고.

  • @parkseungheeify

    @parkseungheeify

    Жыл бұрын

    “일제강점기”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점령한 사실이 없습니다.

  • @wsbeom

    @wsbeom

    Жыл бұрын

    @@parkseungheeify ㅇ? 이건 좀 논란이 있겠는데

  • @jpark8194

    @jpark8194

    Жыл бұрын

    @@parkseungheeify 이건좀..러일 전쟁 이후로 협박으로 강제합병 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요

  • @cannonhitter37

    @cannonhitter37

    Жыл бұрын

    @@parkseungheeify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빼앗기고 1910년에 강제병탄되고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은건 사실인데 뭐가 강제 점령한 적이 없습니까?

  • @cielastro
    @cielastroАй бұрын

    원재님의 의견에 적극 동의 합니다...

  • @fucochoi6520
    @fucochoi652010 ай бұрын

    불편한 진실이지만 맞는 말씀입니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youendam6805
    @youendam6805 Жыл бұрын

    선생님의 믿음에 대해, 강한 신뢰로 경청하고 배우겠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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