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거제포로수용소 거제식물원견학 파노라마케이블카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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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산악회
거제 포로수용소는6.25때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곳 이었다
지금은 전쟁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그때의 기록을 담고 현대인들에게 전쟁의 기억을 일깨워 주는 곳이 되었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4개의 zone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전쟁zone 포토zone 복원zone 평화zone 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6,25전쟁으로 발생한 수 많은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유엔군은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부지로 선택했다.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된다는 점,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토지가 있다는 점등이 그 이유였다.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수용소가 설립되고, 이후 포로 분리에 따른 분산 수용을 위해 거제도 남부면 저거리, 용초도와 봉암도 등지에 추가로 수용소가 설치 되었다. 그렇게 거제도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제1의 포로수용소, 캠프 넘버원이 되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 곳곳에 둘러진 철조망은 포로수용소의 안과 밖을, 내부의 경계를 구분지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는 4개 구역과 그 하부 구조의 28개의 수용동으로 이루어 졌다.
중앙계곡 (고현동)에는 제6구역,
동부계곡(수월동)에는 제7,8,9구역이 설치 되었으며,
수용동 내부는 관리자공간과 포로 생활공간으로 나뉘었다.
관리자 공간에는 유엔군 사령부와의 연락 수단인 초단파구역 중계소를 비롯하여 비행장, 보급창고, 숙소, 화장실 등이 있었다.
그리고 포로 생활공간에는 포로막사, 야외취사장, 야외 화장실 등이 있었다.
그 밖의 특수시설로 민간정보교육국(CIE)교육동, 야전병원, 감옥 등이 자리 잡았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국적과 출신, 이념이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전쟁포로의 대부분은 정규군인 이었으나,군인이 아니어도 유엔군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하는 경우 포로가 되었다.
따라서 일부 피란민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도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포로 15만여명,
중국군 포로 2만여명 등
최대 17만 3천여 명의 전쟁포로가 수용되었다.
또한 대규모 포로를 관리하기 위한 부대 병력과 행정인력, 포로를 심문하거나 의사소통에 필료한 통역원 그리고 포로 재교육을 담당한 교관, 이 밖에도 의사와 간호사, 목사와 신부, 각종 편의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6.25 전쟁은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제3협약, 1949.8.12)'이 적용된 첫 사례이다. 이에 거제조 포로 수용소 포로들은 이전의 전쟁포로와는 달리 굶주리는 일도 ,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일도 없이 어느 정도 안락한 생활을 보장 받았다.
자치제를 도입하면서 하루 세끼 식사를 직접 준비하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직업교육을 받았으며, 취미생활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도 주어졌다.
이처럼 포로들은 철조망 속에서 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
포로들의 일상은 평범했다.
새벽 5시30분 기상과 동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아침 6시 30분 점호를 받았다.
오전 7시 일과가 시작되었고,
오전 11시 30분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1시 다시 점호를 받고,
오후5시까지 오후일과가 진행되었다.
일과 시간에는 포로 생활에 필요한 물자운반, 도로 보수작업, 환경작업, 취사장 작업 등 단순 노역을 했다.
오후 5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취침 전 점호시 까지는 자유시간으로 세탁을 하거나 운동과 독서등의 개인 취미활동 시간을 가졌다.
저녁8시 소대별 점호를 취한 후 취침에 들면서 하루 일과를 끝냈다.
수용소 당국은 포로의 인권을 보장하는 제네바협약(제3협약)을 준수하고 있으며,친공포로까지도 잘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교육활동과 각종 행사를 지원했다.
포로에 대한 교육활동은 1951년 6월 부터 1952년 5월까지 진행 되었다.
포로교육이 진행괸 일년 여 동안 포로는 대장장이, 목수, 이발사, 구도수선공, 인쇄공 등의 직업교육과 문맹교육을 받았다. 또한 포로올림픽, 음악 및 연극 공연, 작품 전시회등 교육결과를 선보이는 특별한 행사도 진행하였다.
또하나의 전장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표면적으로 전선의 최후방에 위치한 안전지대였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한 이념적전투가 진행되는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포로 수용소내의 포로들은 매우 다양한 이념적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친공과 반공이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지를 강요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념적 지향을 지닌 포로들 사이에서는 극심한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전협정 논의 후 극심한 포로 송환에서 포로들은 자신의 송환될 나라의 국기를 앞세우고 송환되었다.
정전회담에서 포로 송환문제는 매번 회담 결렬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포로교환 인원과 송환방법을 놓고 전쟁은 1년 이상 길어졌다. 마침내 1953년 4월 포로교환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며, 이때 부터 거제도 등 남한의 여러 곳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다양한 곳으로 송환되기 시작하였다.
중국군 포로는 중국대륙으로 돌아가거나 대만으로 목적지를 선택했다.
북한군 포로는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반공포로"로서 남한에 남거나 아니면 제3국을 택하였다.
포로들은 자신이 송환될 곳의 국기를 스스로 만들었으며, 이 국기를 앞세우고 송환되었다. 어디를 선택했던지 그 후 포로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포로송환 (1953.8.5~9.6) 빅스위치 작전
1953년 6월8일 체결된 "포로송환협정"을 근거로 ,
송환희망 포로를 대상으로 한 "빅스위치( Big Swich) 작전이 실시 되었다.
당시 포로 분산 작전에 의해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
대부분이 거제도와 제주도에 집중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로와 해로를 통해 교환지점인
판문점까지 수송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포로 송환 업무는 33일간에 걸쳐 진행 되었으며,이로써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순차적인 폐쇄과정을 밟게 된다.
포로수용소를 기억하며 남긴 글
군번없는 민간인 포로들과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명하지 않은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이 아니라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포로는 철조망 우리에 갇혀 있을 뿐 풍부한 미군물자 덕분에 의식주 상태가 국군보다 훨씬 나으니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는 일이라
오세희,65포로수용소
포로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은 확실히 정상상태를 넘어 병적인 정도까지 이르는 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 피난민이건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거러지건 아니 수용소 철망 밖에 있는 것이라면 소나 망아지 같은 짐승까지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황홀하고 행복스런운 구경거리였다.
한걸음이라도 좋으니 철창 밖에 나가 보았으면! 이것이 포로들의 24시간을 통하여 잊혀지지 않는 몸에 박힌 염원이요 기도 였다.
김수영 , 내가 겪은 포로생활
주말산행과 평일산행
아름다운 산과 산사, 둘레길과 마을길 계곡과 바닷길등 자연과 도시를 다니며 역사가 있는 스토리를 담고 아름다움을 담고 추억을 남기기 위해 영상작업을 합니다
영상의 출연자는 주인공이 되고 , 기록을 되고 , 다른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은 변하고 차방넷에서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상과 사진에 남게 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산에 오르고 , 계곡을 담고 , 바람을 담고 , 파도를 담아 두었습니다
언제나 다시 열면 그대로 전해주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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