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회 무삭제 확장판] 분열과 번영, 일본 전국시대 5부ㅣ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 YTN2

Ойын-сауық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통해 상대의 실력을 확인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칼을 거둬 화해에 이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교토를 떠나 현재의 도쿄 지역에 정착하며 훗날을 도모한다. 한편, 일본의 패권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길어지면서 히데요시에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이후 일본의 양 세력이 크게 맞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에서는 분열과 번영의 일본 전국시대에 관해 자세히 알아본다.
00:00 시작
01:05 반으로 나뉜 일본, 이후 상황은?
03:49 당시 히데요시의 상황은?
06:00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 배경은?
15:31 길어지는 전쟁, 당시 내부의 분위기는?
17:08 히데요시의 최후는?
21:24 히데요시의 죽음, 그가 마련한 대책은?
27:43 칼을 맞대게 된 다이묘들, 이후 상황은?
30:58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의 작전은?
34:32 전투 시작, 양측의 전투 상황은?
38:16 도시락 먹는 아군, 서군의 운명은?
#일본전국시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이에야스 #이순신 #뉴전사 #허준 #윤지연 #임용한 #임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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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ікірлер: 129

  • @user-kd1fr9ho6m
    @user-kd1fr9ho6m11 ай бұрын

    박사님. 셔츠 사이즈를 조금만 늘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순환계통이 걱정됩니다

  • @khb1713
    @khb17132 ай бұрын

    정주행중인데 재밌네요

  • @user-ez9dt1nl6u
    @user-ez9dt1nl6u11 ай бұрын

    좋은방송 만들어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 @user-ic3qc3tx9s
    @user-ic3qc3tx9s11 ай бұрын

    17:02 이야기 흐름 상, 구토를 하는 (토사)곽란을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 자막이 잘못 쓰여진 것 같네요 ㅎㅎ

  • @jeako6040
    @jeako604011 ай бұрын

    갓터멘터리

  • @user-fx6mm5sv2q
    @user-fx6mm5sv2q11 ай бұрын

    근데 시마즈 돌격 후퇴는 대부분 다죽고 요시히로랑 겨우 몇명만 돌아갔음 요시히로가 돌아가겐 크긴하죠

  • @andrewoh7360
    @andrewoh73605 ай бұрын

    토전사 멤버들 그립네요

  • @toomhong5018
    @toomhong501811 ай бұрын

    젤재밌음

  • @gamevideochannel1550
    @gamevideochannel15509 ай бұрын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ㅎ

  • @user-qw4wi3de7i
    @user-qw4wi3de7i11 ай бұрын

    임진왜란때 2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이 전투에서 죽었구나.. 재밌다.

  • @GOM_Bal_Ba_Dack
    @GOM_Bal_Ba_Dack10 ай бұрын

    윤아나 너무 귀여워....

  • @kijik7975
    @kijik79759 ай бұрын

    임철균 연구원님 나오에장 설명에서 현웃 터져서 멈추질 않네요 ㅎㅎㅎㅎ 좋은 설명과 깊은 식견 보여주시는 박사님 연구원님 거기에 두 분의 입담까지 지루할 틈이 없네요

  • @user-ud4qb9qq3k
    @user-ud4qb9qq3k11 ай бұрын

    도쿠가와 땅보고 기냥 몰빵한게 대단하내요 이야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11 ай бұрын

    시마즈 요시히로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까지 전사시켰으니깐요. 사실 이순신 장군 외에도 이영남, 방덕룡, 고득장, 이언양 등의 장수들도 전사하고 명군 장수는 등자룡이 전사를 하죠. 이 시마즈 가문이 통치하는 사츠마번은 250년 뒤에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는 세력이 됩니다.

  • @place01

    @place01

    10 ай бұрын

    반면 일본은 지휘관급 인물은 한 명도 안 죽고 전원 귀환...당초 주목표였던 코니시 유키나가도 무사히 빠져나감. 거기다 통제공까지 전사시켰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목표 초과 달성이라고 볼 수 있음. 그래서 일본 애들은 노량해전을 패전이라고 생각 안 한다고 들었음;;

  • @bkjeong4302

    @bkjeong4302

    7 ай бұрын

    사실 시마즈 가문이 노부나가 전성기 시절부터 패배시 포위를 돌파하고 퇴각하는 것을 특기로 했었습니다. 심지어 조총병을 주력으로 한 퇴각교전용 교리까지 만들어냈으니…

  • @user-zq3qi6by5c
    @user-zq3qi6by5c11 ай бұрын

    오호라

  • @TV-db8hf
    @TV-db8hf11 ай бұрын

    혼다 다타카츠 안나와요?

  • @eliyahaverial
    @eliyahaverial9 ай бұрын

    17:04 광란이 아니라 곽란 아닌가.

  • @user-uh1du7hn6z
    @user-uh1du7hn6z10 ай бұрын

    토전사가 뉴전사로! 연합뉴스가 이 좋은 프로그램을 이어받아 다시 발굴하여 꽃을 피워내다니!!!! 감사합니다!

  • @user-fx6mm5sv2q
    @user-fx6mm5sv2q11 ай бұрын

    조소카베 애들은 왜 안왔을까 얘들은 그나마 충성도가 높았는데

  • @user-cs6dp5xj5l
    @user-cs6dp5xj5l11 ай бұрын

    아무리 좋은 지형과 전술이어도 결속력과 지휘통제가 안되는 연합군대는 무참히 격파 당하는군요.

  • @alexlee3008
    @alexlee300811 ай бұрын

    저때 일본은 동시대 최강 전투력을 가진 군대중 하난데 그래도 우리나라 어떻게든 버텨낸게 진짜 다행이다

  • @wepo511.

    @wepo511.

    11 ай бұрын

    경복궁 함락되지았나요?

  • @poekore8472

    @poekore8472

    11 ай бұрын

    그야 똑같은 동시대 최강 명나라가 아군으로 참전했으니까요

  • @user-ic7gm3pm7d

    @user-ic7gm3pm7d

    11 ай бұрын

    버텼다기보다는 개쑥대밭되고 왕은 나라버리고 튀려던차에 이순신이 보급끊고 게임체인저 역할을 한거지

  • @WeeklyMuskNews

    @WeeklyMuskNews

    11 ай бұрын

    그나마 일본이 보병이라 할만했지 그 후에 청나라는 기병이라 후장까지 싹다 털림

  • @user-hf7zw7je5g

    @user-hf7zw7je5g

    11 ай бұрын

    ​@@wepo511.백성들이 불태운걸로 알고 있음

  • @bobobo36980
    @bobobo3698011 ай бұрын

    나폴레옹조제핀 일대기도 다뤄주시면 안될까요 아우터리츠나 워털루등등

  • @fourtytwo-anonymous
    @fourtytwo-anonymous11 ай бұрын

    2:45 관동이 평야이긴 했지만 습지, 늪 같은 당장 쓰기 힘든 땅이 많았습니다... 좋은거 알아도 당장 전쟁하기도 바쁘니 장기 개척 프로젝트가 힘들수 밖에요. 지금도 토쿄 지명보면 무슨무슨 시마(섬)이니 하는 지명도 많고, 지하철에는 항상 해발 몇미터 이런거 적혀있고 홍수맵도 상세하게 작성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 @yhcsekai
    @yhcsekai11 ай бұрын

    지도랑 같이 보니까 이해하기 쉽네요

  • @fujiwara_effect
    @fujiwara_effect11 ай бұрын

    시마즈의 전진철퇴가 유명하지 ㅋㅋ

  • @francescototti4200
    @francescototti42004 ай бұрын

    샤를님이 빠지다니..

  • @panzer3221
    @panzer322111 ай бұрын

    아직도 우리 자랑스러운 국방티비가 볼만한 것도 없이 세금받아 운영하면서 그나마 인기많던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왜 폐지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밤이네요^^ 서울하늘에 북한 드론날라다니면서 드론킬러 천마 유투브에 올리던 국방티비가 생각나는 날입니다. 항상 건승하세요~~!!

  • @user-kk8kv6by3d

    @user-kk8kv6by3d

    11 ай бұрын

    재앙이 폐지했어요.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11 ай бұрын

    오류 지적합니다. 11:44 '분로쿠의 역(文禄の役)'은 '분로쿠 년에 행한 역사'가 아니고 '분로쿠 연간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분로쿠(文禄)'라는 것은 당대 천황의 연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이라고 하는데, '만력 연간에 일어난 조선에서의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분로쿠 케이쵸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1990년대부터 객관적이고 주관성이 배제된 용어를 사용하고자 만들어낸 용어이고, 1980년대까지는 일본에서 '조선 출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임진왜란 당대의 일본에서는 '조선 정벌', '정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 @cheulkyunlim8389

    @cheulkyunlim8389

    11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임철균 연구원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분로쿠의 역은 분로쿠 연간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으로 역자는 부릴 역자입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정한 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었고 관련된 문헌으로 에도시대의 임진왜란 통사인 '정한위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만력삼대정고(왜)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지요. 지적해주신대로 1990년 이후 한일 학자간의 합의에 의해 분로쿠의 역이 학계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역사라고 표현한 것은 해당 뜻을 내포하여 전했던 것이었으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보이긴 합니다. 앞으로 방송을 전함에 있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이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ashton01011
    @ashton0101111 ай бұрын

    나오메 --->나오에

  • @user-wg7lz7gb1l
    @user-wg7lz7gb1l11 ай бұрын

    은영전 에서 시시오산 전투 오마쥬 했구나 연합군이 쪽수믿고 학익진 쓰다 오히려 지휘관들 스텟 딸려서 라인하르트 한테 각개격파 초토화 되는거😅

  • @stevenrhee8398
    @stevenrhee839815 күн бұрын

    노란색 수트에 파란색 바지라?

  • @user-vg1tv4xx3l
    @user-vg1tv4xx3l8 күн бұрын

    침략전쟁을 네트워크로 표현 어색하다

  • @user-bn1ch8ot7r
    @user-bn1ch8ot7r11 ай бұрын

    일본의 덴노와 쇼군의 관계는 후한 말 헌제와 조조의 관계와 비슷할까요? 히데쓰구를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삼아야 했죠.

  • @user-yr5bh4mu6q
    @user-yr5bh4mu6q11 ай бұрын

  • @uru8284
    @uru828411 ай бұрын

    앗 이조합은~~!!

  • @donpakonel104
    @donpakonel1043 ай бұрын

    어차피 이에야스가 아니라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통일했어도 결과는 에도시대 같은 방식으로 갔을거라고 토전사에서 박사님이 얘기하셨던게 맞다고 봅니다.

  • @acknowledgebook8494
    @acknowledgebook84943 ай бұрын

    7:42

  • @user-xx1pb5gh1u
    @user-xx1pb5gh1u11 ай бұрын

    윤지연 아나운서 허준씨하고 방송 오래해서 닮아 가네요

  • @easychordsong

    @easychordsong

    11 ай бұрын

    ㅋㅋ거의 이제는 만담듀오

  • @acknowledgebook8494
    @acknowledgebook84943 ай бұрын

    4:12

  • @polina0616able
    @polina0616able11 ай бұрын

    👍👍👍👍👍👍👍👍

  • @user-uw2ej5qi5r
    @user-uw2ej5qi5r14 күн бұрын

    세키가하라에서 죽자고 싸운 다이묘들은 몇 안됨 히데이에 고니시 오타니 이시다 에케이만 좀 싸우고 주력들은 구경만 하다가 집에 가버림

  • @jamesmillerjo
    @jamesmillerjo10 ай бұрын

    17:04 광란이 아니라 곽란(설사 및 구토) 이야기입니다.

  • @user-fx6mm5sv2q
    @user-fx6mm5sv2q28 күн бұрын

    히데요시가 생전에 미쓰나리한테 100만석 준다고 했는데 미쓰나리가 괜찮다고 자기 청렴한걸로 무기삼아 다른 무장을 탄압했는데 결국에 저 전투에서 미쓰나리한테 100만석이 있었으면 자신직속의 최소 1만5천의 병사가 있었을껀데 아마 이겼을꺼야 서군이 사콘이라는 선봉장도 있었고 이래서 생긴말이 어른이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된다 이런말이 생긴거지

  • @user-ol5xi2su8h
    @user-ol5xi2su8h10 ай бұрын

    이 조합도 아주 좋은것 같아요...😊

  • @user-bn1ch8ot7r
    @user-bn1ch8ot7r11 ай бұрын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오사카 성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에게 함락 당하고 요도도노와 아들 히데요리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죠.

  • @eunkwanlee1252
    @eunkwanlee12523 ай бұрын

    히데요시의 도박, 조선침공. 늙도록 아이를 못 낳다가 젊은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은 과연 자기 자식일까요???...ㅋㅋㅋ

  • @PD-ns1es
    @PD-ns1es11 ай бұрын

    아사이나가마사

  • @user-dl1ft8bw8e
    @user-dl1ft8bw8e11 ай бұрын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일찍 죽는 바람에 노부나가가 힘들게 이뤄놓은것을 이용해서 너무 쉽게 일본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거 같고... 한편으로는 노부나가의 그림자를 지우고 자신의 권위와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무언가 대단한것을 하고 싶었을것이고 그것이 조선 정벌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위에 천황이 있는데 천황의 위광이 너무 높아서 함부로 죽일수는 없으나 내가 조선을 정벌하고 운이 좋아서 명나라까지 정벌하면 자기가 천황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욕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 @user-vh8ni3fe1w

    @user-vh8ni3fe1w

    11 ай бұрын

    노부나가 의 의지를 이어 받았다고 봐야 노부나가 가 명과 인도까지 정복 하려 했음

  • @user-dl1ft8bw8e

    @user-dl1ft8bw8e

    11 ай бұрын

    ​@@user-vh8ni3fe1w나도 이 생각을 안한건 아닌데... 노부나가한테 들었던걸 좋아보여서 자기가 했을수도...

  • @apeach5666
    @apeach566611 ай бұрын

    조총이 임진왜란때 큰 충격을 준 이유가 활 성능 자체가 형편 없던 왜를 상대로 원거리에서 큰 이점이 있던 활의 달인 조선의 군대가 원거리를 대등 혹은 상회하는 조총의 원거리 능력에 당황해서 빠르게 무너졌던게 임진왜란 초기에 크게 밀렸던 이유가 아닌가 싶네요.

  • @8d979

    @8d979

    11 ай бұрын

    오해가 있으신것 같아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총 유효사거리 즉, 살상력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최대가 50m고 일반적으로는 고작 25m는 되야 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편전은 200m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원거리능력에 우리나라가 절대 밀리지않죠. 조총은 전술적측면에 따라 그에 맞춰 상황에 사용할뿐이지 왜군의 주특기는 근접백병전이죠 우리나라의 주특기가 원거리고

  • @user-yj8xe1oy5s
    @user-yj8xe1oy5s10 ай бұрын

    이프론 뒷배경이 왜이리 이상하지?

  • @fhffuyckh
    @fhffuyckh11 ай бұрын

    일본이 조선에 25만이라는 거대한 병력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고작 4~5만정도로 예상했다는게 정보수집의 큰 실패지요. 전쟁준비도 딱 4~5만 병력의 침공에 대비했었으니 그렇게 초반에 속절없이 무너진거였고요. 25만정도를 움직일 정도면 그 징후가 만만치 않았을텐데 예상을 못했다는건 일본의 국내사정과 정세변화에 그만큼 무지했다는거겠죠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

    11 ай бұрын

    조선도 사실은 일본군 침공 1년 전에 사신들을 보내서 일본 정세를 간파했지만, 국내의 당파 싸움 때문에 침공 준비 사실을 외면하고 대비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침공 1년 전에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여 명나라 원정에 앞장서라는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고는 상국이자 종주국인 명나라에 보고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보고를 하게 되면 일본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을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전쟁을 외면하고 싶었다'라고 보는 게 맞을 듯 싶습니다. 명나라는 전쟁 발발 1년 전에 자체 정보 루트를 통해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1591년 4월에 류큐(琉球)를 방문한 상인 진신(陳申)이 그 사실을 알아냈고, 이것이 복건성과 절강성에서 순무(巡撫) 벼슬을 하고 있던 지방관료를 통해 정식보고로 조정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일본이 명나라 침공을 계획하고 있는데 조선이 그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함께 명나라 침공을 공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요동순무(遼東巡撫)에게 병사를 보내어 국경 방비를 강화시킴과 동시에, 조선의 정세를 내탐(内偵)하였는데요. 1591년 8월에 조선 사신 김응남이 명나라 황제에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돌아가 명나라 조정도 만족했으나 그 무렵 신임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조선 조정에 대해 일본의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정벌할테니 길을 안내하라) 요구가 있었는지를 캐묻는 문의를 하였고, 이에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어져 류성룡과 최립(崔岦)이 작성한 조선국왕 명의의 '진왜정보주문(陳倭情報奏文)'을 한응인(韓応寅)에게 주어 명나라로 급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9월에는 사츠마(薩摩)에 거주하고 있던 명나라 의사 허의준(許儀俊)이 "이미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여, '정명향도'에 협력하려고 하고 있다"라는 보고를 명나라 조정에 올려 조선 조정에 타격을 주었고, 또 류큐왕국(琉球王国)도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정형(鄭迥)과 소팔(蘇八)이라는 귀화 중국인들을 비롯한, 일본에 거주하는 복수의 정보원들에게서도, 조선이 일본에 복속했다고 하는 내용의 보고가 명나라 조정에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 1592년 정월 무렵에 명나라 조정에 조선의 진주문(陳奏文) (윗사람에게 사정을 아뢰는 문서) 이 제출되어, 조선 사절은 다시 한번 조일 교섭의 경위를 명나라 조정에 상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던 사실은 한사코 숨기면서, 중국인 정보원들의 보고 등에 대해서는 조선에 대한 무고라고 비난할 뿐이었고, 일본의 침공 계획은 말도 안되는 허위사실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정명향도'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지 못했고,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던 일본의) '조선 침공'이 현실화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후에 명나라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 요동의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조정을 힐문하며, 군사지휘권의 통일에도 반대하였고, 조선 백성들의 일본군에 대한 협력을 의심하며, 조선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였습니다.

  • @milchholstein884
    @milchholstein88411 ай бұрын

    저때 안타까운게 의병장들 중에 누구 하나 조선을 뒤엎고 자기가 왕이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은 성리학 탈레반 막장의 길을 걷기 시작함.

  • @hydrocynus415

    @hydrocynus415

    11 ай бұрын

    ㅋㅋ 선조가 문민통제를 오지게 잘했기 때문임 ㅋㅋ

  • @user-px2nt6ri1o
    @user-px2nt6ri1o11 ай бұрын

    전쟁이 장기화 된 것은 이순신과 조선수군 때문인 것은 맞지만 명의 원군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 @user-wo3er2ks1f
    @user-wo3er2ks1f6 ай бұрын

    정명가도라고 하면서 조선땅으로 침입했는데~? 오키나와쪽으로 남서북진해서 직접 명국을 침략했어야지~?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11 ай бұрын

    임진왜란의 가장 큰 분기점은 명군 참전이 아닐까요? 명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왕조는 1592년에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Boyd123

    @Boyd123

    11 ай бұрын

    맞습니다

  • @user-wx5id3zu8w

    @user-wx5id3zu8w

    11 ай бұрын

    명이 조선에 와서 노략질을 일본만큼 했고 패한 적도 많은데 시간만 끌어준거 말고는 별 도움이 안됐습니다 초반 우왕좌왕 하던 관군들은 재정비를 하고 이순신장군의 보급로 차단과 의병들의 활동으로 이긴 전쟁입니다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

    11 ай бұрын

    @@user-wx5id3zu8w 일단 명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일본군은 조선 팔도 전체를 차지했을 것이고, 조선군과 의병들은 대규모 동원이 불가능하여 각개격파당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쟁을 지휘할 조정이 부재했겠죠.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했을테니까요. 그리고 임진왜란 전체의 전투를 보시면, 특히 정유재란 때에는 전투 시 거의 명군의 병력이 조선군보다 더 많았습니다. 조선군과 의병,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폄하하는 게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조선 단독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명일 강화회담만 봐도 조선은 강화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 @poekore8472

    @poekore8472

    11 ай бұрын

    정유재란 때는 아예 야전은 명나라 혼자 한거나 다름 없었죠

  • @user-vh8ni3fe1w

    @user-vh8ni3fe1w

    11 ай бұрын

    고려 황제 만력황상의 조선에 지원한 쌀만해도 어휴 만세만세 만만세

  • @joecho1427
    @joecho14276 ай бұрын

    일본입장에선 이순신이 원수네

  • @joecho1427
    @joecho14276 ай бұрын

    MC좀 바꿔라

  • @user-rt1xt6qm8u
    @user-rt1xt6qm8u11 ай бұрын

    히데요시 몰락 기대된다

  • @Jcat417
    @Jcat41711 ай бұрын

    やっまぬってつほらぢか

  • @TV-pu5ph
    @TV-pu5ph11 ай бұрын

    윤지연 아나운서 토전사때와 비교해 보면 참 얼굴에 연륜이 느껴진다~~^^

  • @user-kd3iv6iz5d

    @user-kd3iv6iz5d

    11 ай бұрын

    그래도 좋은데요~

  • @user-wu8jg9tc9i

    @user-wu8jg9tc9i

    11 ай бұрын

    ​@@user-kd3iv6iz5d🎉😮😢😢😢

  • @user-hg7qk7fm1o
    @user-hg7qk7fm1o12 күн бұрын

    일본전문가들 많네...

  • @user-px2nt6ri1o
    @user-px2nt6ri1o11 ай бұрын

    노량전트에서 일본군이 대패했나? 주력은 계획대로 다 도망갔잖아?

  • @juhyunglee2668
    @juhyunglee266810 ай бұрын

    임철균 연구원도 차분히 잘 하시지만 우린 샤를황제를 원한다. ㅋㅋㅋㅋㅋ

  • @user-bx5oh8bk9w
    @user-bx5oh8bk9w11 ай бұрын

    역사속의 아이러니는 참 많은거 같습니다. 임진왜란때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명한 카톨릭 신자로 전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인물이었죠. 무투파인 가토키요마사는 일본의 불교 일연종의 열렬 신자로 알고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한 서군의 시마즈 가문과 모리 가문은 전쟁후 영지를 많이 몰수당했고, 이들이 후일 메이지 혁명의 주축세력이 된 것도 아이러니 합니다. 다시 히데요시 세력이 승리한거로 보이네요. ㅠㅠ 메이지 신정부에 끝까지 저항한 것이 아이즈번의 도쿠가와 가문의 후손들이었고, 지금도 동북지역은 일본정부에 대해서 그닥 우호적이지는 않습니다. 특히 아이즈(후쿠시마 주변)사람들은 가고시마(시마즈)사람과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뿌리깊은 적대감이 있었지요. 이 두지역은 나름 화해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는데도 아직까지 그닥 우호적이지는 않습니다. 도쿠가와 후손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후쿠시마 지역에서 원전사고가 일어난것도 슬픈일이고, 이것을 벌이라고 박수치던 사람들도 한심하다는 생각이듭니다. 1진이었던 고니시의 18700명중에 조총부대는 3300명이었습니다. 주력은 8800명가량의 장창부대!

  • @place01

    @place01

    11 ай бұрын

    토사 야마우치 이야기도 재밌지요. 쵸소카베가 다스리던 토사는 서군이었던 쵸소카베 몰락 이후 동군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차지하게 되어 이후 쭉 야마우치가가 토사를 다스리게 되는데 이 토사번은 보신전쟁 때 사츠마-쵸슈와 함께 막부 타도파 ㅋㅋ

  • @lee-kikmong
    @lee-kikmong10 ай бұрын

    cool❤ love from japan❤

  • @user-or2zh4fd1r
    @user-or2zh4fd1r11 ай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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