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리랑

선아리랑

세상과 소통합니다.아름다운 세상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함께하면 좋은 세상 만들기.

Пікірлер

  • @user-ob2px2ml4l
    @user-ob2px2ml4l2 сағат бұрын

    와우~~신나욤 🎉🎉🎉🎉🎉🎉🎉🎉🎉🎉🎉🎉

  • @flyljd
    @flyljd12 сағат бұрын

    이분이 진짜의사이십니다

  • @user-xm8pl7sf9p
    @user-xm8pl7sf9p14 сағат бұрын

    엄청잘하시넴

  • @user-ui1cg7od2e
    @user-ui1cg7od2e14 сағат бұрын

    멋진날들로 수놓아 보아요~~^^

  • @user-qg9nm6gg4h
    @user-qg9nm6gg4h14 сағат бұрын

    너무 잘하시네요🎉🎉🎉🎉🎉

  • @user-gw9kh7tz7b
    @user-gw9kh7tz7bКүн бұрын

    당뇨환자가 할말이지 의사가 할말은 아닌 것 같다.

  • @user-ur9jl8wl7x
    @user-ur9jl8wl7x2 күн бұрын

    잘보고 들었습니다👍

  • @user-sh7pg7rz8x
    @user-sh7pg7rz8x3 күн бұрын

    아직도 멋쟁이 노래도 잘하시고 신인이시고 멋져요

  • @park.j.s
    @park.j.s3 күн бұрын

    가수 고정희님 응원합니다ㅡ 짝짝짝짝짝짝 대박나세요 ㅡ으럇차차 🎉🎉🎉🎉🎉🎉🎉

  • @user-ju1jn4mw1j
    @user-ju1jn4mw1j3 күн бұрын

    🎉

  • @stratovarlus2934
    @stratovarlus29344 күн бұрын

    스님이신가봄니다😂😂❤❤❤

  • @user-cl8ok9ic3s
    @user-cl8ok9ic3s5 күн бұрын

    너무 아름다워요. 우리 오카리나 연주곡

  • @jkgoodgood1729
    @jkgoodgood17295 күн бұрын

    관상에서 사기라고 써있네 ㅋ

  • @geunjookim1923
    @geunjookim19235 күн бұрын

    폴카장단 쿵 따다 쿵따 쿵따다다 쿵타 쿵 따다 쿵타 쿵쿵 따다 쿵타 쿵타 쿵 따다 쿵타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하루 이 장단으로 즐겁게 지내볼게요

  • @pes4176
    @pes41765 күн бұрын

    와룡머쪄 와룡머쪄 화이팅 !!

  • @ilksmlee9063
    @ilksmlee90637 күн бұрын

    어느 무대에서건 최선을 다하는 세계 최고의 보컬

  • @hyoinahn7020
    @hyoinahn70208 күн бұрын

    스님 최고이십니다

  • @user-hy6fg1li8n
    @user-hy6fg1li8n8 күн бұрын

    노래도좋고 스님도잘부르시고 대힛트 치세요

  • @TV-dh9gv
    @TV-dh9gv10 күн бұрын

    좋은 강의 감사드리옵니다

  • @user-st9yx3pm2x
    @user-st9yx3pm2x13 күн бұрын

    현장스님 옷차림 모자 짱이네요 늘 그리 사시길

  • @Al-tr2ui
    @Al-tr2ui13 күн бұрын

    인민들 잘 챙기길 두 조선 여정 잘챙기길

  • @Al-tr2ui
    @Al-tr2ui13 күн бұрын

    여정은 뭐하는지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武家政権(ぶけせいけん)は、日本史上の政治形態の一つ。 武家が独自の権力と組織をもって行なった政治的支配のことで、 12世紀末の鎌倉幕府の樹立から1867年 (慶応3年)の江戸幕府の終末までの約700年間がこれにあたる。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朝鮮籍」も参照 韓国併合によって大韓帝国が消滅すると、日本は韓国の地名を朝鮮とし、朝鮮に本籍地を有する日本臣民となった者が法律上、「朝鮮人」と称されることになった。 本国(内地)と植民地という力関係を反映し、「朝鮮人」やこれを略した「鮮人」という呼び方には見下すようなニュアンスがこめられがちであるため、 「朝鮮出身者」「朝鮮の方」といった遠まわしな言い方がしばしば使われた。 朝鮮総督府は 内地人に「鮮人」と呼ばないようしばしば呼びかけ、多くの文書で「朝鮮(半島)同胞」との呼称を用いた。 旧陸軍においても朝鮮人兵士に対して「朝鮮人」や「鮮人」の語を使用しないよう指導がなされていた。 日本の朝鮮統治が終わった後もこのような傾向は続き、現在に至るまでも面と向かって「朝鮮人」と言うのを憚る風潮が存在する。 しかし、「朝鮮」を統一名称とみなしている、または韓国を支持しない等々さまざまな理由から、在日朝鮮人が好んで「朝鮮人」を自称するケースもあるため、必ずしも蔑称とはみなされていない。 韓国・北朝鮮の成立後は、全体を漠然と指すときは従来通りの「朝鮮人」が多く用いられ、特に韓国の国籍を保持する者を「韓国人」と呼んで区別している。 「韓国人」の対立概念として「朝鮮人」を使用する場合には、北朝鮮を正統国家として支持する者や、または朝鮮籍の在日朝鮮人を限定して指すこともある。 マスコミでは、「韓」と「朝鮮」との区別が問題になることを避けるために漠然と「朝鮮民族」と称することが多い。 日本語では朝鮮族という言い方も存在するが、これは中国吉林省延辺朝鮮族自治州を中心に、中国東北部(満州)やロシア沿海地方などに住む朝鮮民族を特に指す語として使われる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ちょうせん アジア大陸東部、朝鮮半島とその付属島からなる地域。北は鴨緑江・豆満江によって中国・ロシア連邦と境をなし、南は朝鮮海峡を隔てて日本と対する。前3世紀ごろに箕子(きし)朝鮮、前2世紀初めに衛氏朝鮮が建国。これを前108年に漢の武帝が滅ぼし、楽浪郡など四郡を設置。半島南部には馬韓・辰韓・弁韓が分立。4世紀に高句麗(こうくり)・新羅(しらぎ)・百済(くだら)・任那(みまな)が対立、7世紀に新羅が統一国家を建設、10〜14世紀は高麗(こうらい)、14世紀以降は李氏朝鮮と王朝が交代。1910年日本に併合され、1945年日本の敗戦によって解放されたが、1948年、北緯38度線を境に、北に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南に大韓民国が成立。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황국신민서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동용 일본어 원문 1. 私共わたくしどもハ、大日本帝國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ノ臣民しんみんデアリマス。 2. 私共わたくしどもハ、心こころヲ合あワセテ、天皇陛下てんのうへいかニ忠義ちゅうぎヲ盡つクシマス。 3. 私共 (わたくしどもハ、忍苦鍛鍊 (にんくたんれん)シテ、立派(りっぱ)ナ强(つよ)イ國民(こくみん)トナリマス。 한국어 번역 1.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 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2) 성인용 ㅡ 일본어 원문 1. 我等われらハ皇國臣民こうこくしんみんナリ、忠誠ちゅうせい以もっテ君國くんこくニ報ほうゼン。 2. 我等われら皇國臣民こうこくしんみんハ、互たがいニ信愛協力しんあいきょうりょくシ、以もっテ團結だんけつヲ固かたクセン。 3. 我等(われら)皇國臣民(こうこくしんみん) ハ、忍苦鍛鍊(にんくたんれん)力(ちから)ヲ養(やしな)ヒ、以(もっ) テ皇道(こうどう) ヲ宣揚(せんよう)セン。 ㅡ 한국어 번역 1.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1.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1.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하련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의 표어다. 자매품으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가 있다. "내지(內地)와 조선[3]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비슷한 예로는 1930년대의 일만일체[4]와 청나라에서 나온 만한일체[5]도 있으며 괴뢰 국가 만주국을 만들면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6]도 마찬가지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해창주조장의 4대 주인 오병인 씨는 본래 양조장과는 인연이 없는 서울도시가스라는 회사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직장인으로 평소 우리 전통주인 막걸리를 즐겨 마시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해창주조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친구와 함께 해남지역을 여행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해창리에 들렀다가 우연히 해창주조장의 술맛을 본 이후 막걸리를 택배로 주문해서 마시면서 인연을 이어나가다 결국 2008년 해창주조장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해창주조장의 막걸리가 오병인 씨에게 잊을 수 없는 맛으로 각인된 동기는 그가 마셔왔던 서울•경기 지역의 막걸리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셨던 막걸리는 머리가 아프거나 몸이 무거워지는 등 숙취가 심했는데, 해창의 막걸리는 그런 게 없었고 맛 또한 좋았다고 한다. 오병인 씨가 해창주조장에서 막걸리 택배를 주문하던 시기는 양조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택배를 하는 일이 흔하지 않던 때였다. 서울에 살면서 땅끝마을 해남까지 꾸준히 막걸리를 주문해 마시는 오병인 씨와 해창주조장 3대 대표 황의권 씨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해창주조장을 대를 이어 할 사람이 없게 되자, 아들이 없던 황의권 씨는 평소 오병인 씨에게 해창주조장 인수를 수차례 권유하였다. 해창양조장의 인수를 권유받은 오병인 씨가 초기에 구상한 것은 양조장 사업보다는 퇴직 이후의 생활공간으로 별장처럼 사용하는 데 방점을 두고 양조장을 인수했다. 또한 그가 해창주조장을 인수했던 2008년 무렵은 양조장이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하는 명목상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해창양조장이 위치한 해창리는 해남읍내와도 9km 동떨어진 곳이었으므로 그저 오래된 주택과 정원이 있는 고즈넉한 양조장에서 적당량의 술만 만들면서 지낼 심산으로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해남에 정착했다. 오병인 씨의 아내 박리아 씨도 남편의 해창양조장 인수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심드렁했었다. 그런 아내가 먼저 보따리를 싸서 내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아마도 해창리의 자연풍광과 해창주조장이 양조장보다는 근대 문화유산으로서의 매력이 그러한 결정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 박리아 씨는 양조장을 인수하면서 술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어다니면서 노력했다. 그녀는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와 전통술 전문가 박록담 씨의 한국전통주연구소 등에서 술 제조법을 익혔다. 또 해창리에 수시 내려와서는 3대 대표였던 황의권 씨에게서도 양조법을 배우면서, 그로부터 전수한 방식을 살려 탁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해창주조장에는 근대 문화유산이 많다. 일본인 시바다 히코에이가 지었던 쌀 창고는 현재도 해창주조장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또 정원에는 오병인 씨가 정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황국신민서사비(皇國臣民誓詞碑)’가 있어 암울했던 피식민지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오병인 씨는 비석 옆에 “한국과 일본 간에 있었던 뼈아픈 과거사를 삭여 놓은 생생한 역사적 유물을 다 같이 반성하고 참회하는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해 마당에 보존, 전시한다”라고 적힌 작은 표지판을 세웠다. 한편, 지금은 없어졌지만 해창주조장 입구 건너편 길가에는 큰 소나무 아래에 세 개의 오래된 비석이 서 있는데, 그중 가운데의 <신선생 백파소요대(申先生 白波逍遙臺)>라는 비명(碑銘)과 “광서 6년 경진 삼월(光緖 六年 庚辰 三月)”이라고 일자가 새겨진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서기로 환산하면 1880년 3월에 세워졌으니 140년이 넘는 비석이다. 비석 측면과 후면에는 당시 동장(洞長)과 감역(監役), 두민(頭民, 주민대표) 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 ‘신선생(申先生)’은 19세기 후반 고종(高宗) 때의 문신 신헌구(申獻求, 1823~1902)이다. 이 비석은 신헌구가 1875년부터 1880년까지 해남에 머물던 기간 중 그가 거주하였던 집터와 소요하였던 정원을 기념하여 마을주민이 세운 기념비이다. 결국 시바다 히코에이가 현재의 해창주조장 자리에 집터를 잡고 정원을 조성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조선시대 중앙의 문신이 잠시 낙향하여 집을 짓고 산책할 목적으로 조성하였던 터가 일본인 사업가의 눈에도 매력적인 공간으로 비쳤을 것이다. 따라서 해창주조장은 비교적 근세지만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군의 근현대사를 간직한 근대 문화유산 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역사 공간이다. * 세개의 비석은 네이비 지도 2015년 촬영 자룡 보면 자세히 나옴 * 일제 잔재를 찾아서-2. 해남 북평면 이진리 2004-02-17 내선일체 강요한 '황국신민서사탑' 북평 이진 초등학교서 발굴 돼 이진 마을로 옮겨져 북평면 이진초등학교 에서 ‘황국신민서사탑’(皇國臣民之誓詞塔)이 발굴됐다. 북평면 이진리 윤용선씨는 2001년 전 이진초등학교에 묻혀있던 이 탑을 발굴해 이진리 선창가 윤씨의 땅에 세워두었다. 황국신민서사탑의 원형이 발견된 것은 해남에서 처음이다. 이 탑은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조선의 경제권을 빼앗기 위해 일제가 만든 조선실업주식회사 목포지점이 창업 25주년을 기념해 이진 초등학교에 세운 것. 이진리에 거주하는 나관주씨는 “당시 이진 국민학교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일본 신사당이 있고, 운동장 교사앞 소재 조회대 오른편에 이 탑이 서 있어 조회를 하기 전에 서사를 암송했었다”며 일제가 한국민에게 황국신민의 자격을 주고 충성을 강요키 1937년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을 제정, 학교에서 매일 아침 외우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1937년 7월부터 신사참배, 1면 1마을에 1신사(神社)의 설치를 강력 추진한 미나미 총독은 급기야 같은 해 10월에는 ‘황국신민 서사’를 제정하고, 한국민에게 암송토록 강요해 조선의 정신까지 지배하려 하였다. 이 비에 적힌 황국신민의 서사의 내용은 ‘첫째,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 입니다. 둘째,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셋째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이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해창주조장이 그런 명소로 부상하게 된 요인에는 해창막걸리의 맛도 있지만, 해창주조장의 주인 시바다 히코에이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해창주조장의 주택과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친이 목재상을 운영하였던 시바다는 일본에서 직접 공수한 목재를 목포를 통해 해창리로 들여와 3년 동안 건조한 뒤 현재 오병인 씨 부부가 거주하는 주택을 지었다고 한다. 주택의 구조는 실내 복도와 가파른 나무 계단, 다다미방을 갖춘 2층 목조 건물 구조의 전형적인 일본 주택이다. 현재 장작을 때는 부엌과 다다미방, 복도 등 실내구조는 개조되어 사라졌지만, 건물 외관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이 집은 시바다 히코에이의 6남매가 일제가 패망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고향 집이기도 하다. 또한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시바다 히코에이는 여느 식민지 조선의 거만한 일본 거류민과는 달리 마을에 사는 조선인들에게도 인심을 잃지 않는 처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마을 아이들에게도 쌀밥과 소고기를 대접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아마도 여섯 남매를 거느린 아버지로서 동년배의 조선인 동네 아이들과 자녀들이 잘 어울리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4대 주인인 오병인 씨는 해남군청에서 당시 가옥대장 등을 열람하면서 시바다 히코에이의 일본 군마현 주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소를 가진 사람을 일본에 수소문한 결과 그의 두 딸과 연락이 닿았고, 2012년 8월 그녀들을 한국에 초청하였다. 두 딸이 방한 당시 지참했던 일본 주민표에는 그녀들의 태생지가 ‘해창리 6-2’로 적혀 있었다. 이 주소는 해창주조장이 도로명주소로 변경되기 이전까지 백여 년간 변동사항이 없이 유지되었던 지번(地番)이다. 또한 그녀들이 가져온 자료 중에는 해창주조장의 옛날 사진도 있었다. 시바다 히코에이의 딸들은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해창주조장의 옛집에 이틀을 머물며 어린 시절 사용했던 방에서 지내다 돌아갔다고 한다. 해창주조장의 또 하나의 명물은 일본식 정원이다. 일본식 정원은 신(神)과 인간의 공간을 연결하여 정원에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산에 우뚝 선 바위나 큰 나무, 하천 등의 자연을 신앙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해창주조장 정원도 바위를 중심으로 언덕과 산, 강, 바다를 재현해 놓는 일본의 정원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식 정원은 고(故)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자연의 축소판이라는 문화적 특징을 갖는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일본인이 세운 약 97년 역사의 ‘해창주조장’ 해창주조장이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는 북쪽의 삼산천 건너 해남읍과 접하고 있는 해남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한다. 삼산천이 서해와 만나는 해창리 인근에는 55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갈대밭이 펼쳐져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고천암(庫千巖)이 있다. 해창주조장의 상호인 ‘해창(海倉)’은 조선시대 해창리에 조운창(漕運倉)이 설치되었던 데서 유래한다. 18세기 후반 전국의 호구(戶口) 현황을 기록한 국가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화산면 연곡리에 있던 조운창(漕運倉)이 내륙으로 10리쯤 이전하여 ‘신해창(新海倉)’이라 한 데서 해창리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해창리는 서울을 왕래하던 남해안 일대의 조운선과 선박이 경유하는 진도군과 해남군의 사이의 해협에 있는 바닷가의 포구였다. 현재는 고천암방조제 공사와 간척공사로 뱃길이 끊겼지만, 해창리 일대는 한때 해남지역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나르던 조운선(漕運船)과 제주를 비롯한 여러 지방을 연결하는 선박들이 드나들던 물류 중심지였다. 넓은 바다의 풍광과 벼농사가 발달한 해창리에 양조장이 들어선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7년 시바다 히코헤이(柴田彦平)라는 일본인이 해창리에 정착하면서 부터다. 시바다는 해창리에 쌀 창고를 설치하고 광주와 목포에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배 3척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미곡상을 하는 사업가 였다. 그는 해창리에 정착한 이래 현재의 해창주조장 자리에 가옥을 짓고 정원을 조성하여 거주하면서 6남매를 낳았다. 미곡상을 하였던 시바다는 쌀 창고가 있던 해창리의 집에서 일본식 청주인 정종(正宗)을 제조한 것이 해창주조장 의 시작이었다. 양조장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시바다는 일본 군마현으로 돌아갔고, 시바다가 살던 해창리의 가옥은 시바다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던 장남문 씨가 불하받고 그의 소유가 되었다. 1950년에 해남 삼화초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장남문 씨는 해창리 가옥에 거주하면서 1961년 집 옆에 별도의 막걸리 주조장 시설을 하고 양조장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뒤로 1970년대 후반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던 황의권 씨가 벼 300섬에 해창주조장을 인수하여 해창주조장의 3대 주인이 되었다. 이후로 30여 년이 흐른 2008년 오병인•박리아 씨 부부가 인수한 이래 현재까지 4대 주인으로서 해창주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 @user-it7yd7ks6d
    @user-it7yd7ks6d14 күн бұрын

    ‘해창주조장’은 1927년 시바다 히코헤이(柴田彦平)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 6-2에 정착한 이후 건축한 일본식 정원을 갖춘 주택에 거주하면서 일본식 청주인 정종(正宗)을 빚으면서 시작한 양조장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직원이었던 장남문 씨가 정부로부터 적산자산을 불하받아 거주하면서 1961년부터 집 옆에 막걸리 양조장 시설을 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강진군 성전에서 막걸리 양조장을 하는 황의권 씨가 인수하여 30여 년간 운영하다가, 이후 2008년 현재 해창주조장의 4대 주인이 되는 오병인 씨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창주조장은 각종 일본식 건축물과 정원을 갖춘 근대 문화유산이자 오병인 씨가 개발한 ‘프리미엄 막걸리’로 소문난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 @user-lg1fw4wj1m
    @user-lg1fw4wj1m16 күн бұрын

    박서진 🎉🎉

  • @user-lg1fw4wj1m
    @user-lg1fw4wj1m16 күн бұрын

    박서진 동영산 보구왔네요 ^^

  • @user-do6ge8rk8n
    @user-do6ge8rk8n16 күн бұрын

    얼쑤~~~^^ 잘~한다~~^^

  • @PrinceMongTV
    @PrinceMongTV17 күн бұрын

    서진이 찿아서 이곳까지 붉은 입술 최고🎉🎉🎉🎉❤❤❤❤

  • @user-zo3jl7ju2m
    @user-zo3jl7ju2m17 күн бұрын

    전국노래자랑 사회자로 딱.이야

  • @Korea2311
    @Korea231118 күн бұрын

    채식 통곡물하고 있는데도 변비가 심하니까 없던 하지정맥류가 생겼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 @user-vs6mb4yz4y
    @user-vs6mb4yz4y19 күн бұрын

    노래 넘~^^ 구성지게 잘~^^^ 부르십니다 가수로 데뷔하시면 추천합니다 좋겠어요감사합니다

  • @user-mt9zh4ge7f
    @user-mt9zh4ge7f19 күн бұрын

    대박 짱입니다~~~♡

  • @user-kq7vf5ov7x
    @user-kq7vf5ov7x20 күн бұрын

    그림 그리는 실력은 타고 나셨지만.., 그림을 계속 보고 있으면... 영혼이 없는 그림 이라고 해야 되나... 그림들이 다 똑같이 보여서요... 저만 그런지, ,😢😢😢

  • @user-cu5rx4ss1d
    @user-cu5rx4ss1d20 күн бұрын

    울산 남구지부~ 작품이 신납니다^^

  • @user-ed6zl4uc9e
    @user-ed6zl4uc9e21 күн бұрын

    드물머리 느티나무는. 정읍. 입암면. 마석리에. 잇는. 느티나무보다 작다. 애를들면 정읍느티나무가. 더. 오래딧다는 애기다

  • @user-iw2ku1zv8d
    @user-iw2ku1zv8d22 күн бұрын

    친구 최고~~

  • @user-fi3xk6qp1d
    @user-fi3xk6qp1d22 күн бұрын

    원장님 폐섬유증에는 방법이 없을까요? 2년사이 페렴이 2번 이나 걸렸네요

  • @DdD-zl8hp
    @DdD-zl8hp22 күн бұрын

    높이 존경합니다

  • @user-vt9jc1jp5d
    @user-vt9jc1jp5d23 күн бұрын

    축하드립니다 멋진공연 잘보고갑니다 원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

  • @user-kq7vf5ov7x
    @user-kq7vf5ov7x24 күн бұрын

    수작은 여기다 있네요😢😢😢

  • @user-kq7vf5ov7x
    @user-kq7vf5ov7x24 күн бұрын

    수작은 시장에 안나오네요😢

  • @user-ne4xo8vh2m
    @user-ne4xo8vh2m24 күн бұрын

    오~ ♡너무멋진연주네요 저기 왼쪽에 박만석선생님 계시네요 반가워요 지난16일 가서 못뵌것이 아쉽네요 여기서라도 오른손 높이올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응원보냅니다 👏 👏 👏 모두모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