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백일법문 92] 원교의 중도설 : 원돈지관 1967년 12월 25일 법문

천태학에서의 수행법을 지관(止觀)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지(止;Samatha)는 산란한 생각들을 그친다는 뜻이고, 관(觀;vipas--yana)은 제법의 이치를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一代敎)를 설법 내용에 따라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사교(四敎)로 교판하였듯이, 수행법인 지관도 사교에 따라 구별하여 장교.통교.별교의 지관을 상대지관(相對止觀)이라 하고, 원교의 지관을 절대지관(絶對止觀)또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원돈지관은 원교의 실상을 마음으로 관하여 실증하는 지관을 말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술 가운데 특히 [하마지관(摩詞止觀)]에서 이 원돈지관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원교의 이론이 전반적으로 원융한 사상과 더불어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원교의 실천 관법인 원돈지관도 역시 중도의 실상경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라는 천태종의 유명한 글귀는 결코 이론적인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으로 관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의 자성이 항상 적멸한 것이 곧 지(止)의 뜻이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곧 관(觀)의 뜻이니라.
지(止)란 정(定)이고 관(觀)이란 혜(慧)인데, 법성 자체의 체(體)면으로 보아서는 지(止)라 하고 용(用)면으로 보아서는 관(觀)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은 지가 곧 관이고 관이 곧 지입니다.
일체만법이 이렇게 상적(常寂)하면서도 상조(常照), 쌍조(雙照)합니다. 상적을 제외하고 쌍조가 없고 쌍조를 제외하고 상적이 없으니, 불 밖에 빛이 없고 빛 외에 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정(有情)이고 무정(無情)이고 할 것 없이 일체만법이 상적쌍조한 상적광토(常寂光土)를 여의고는 일체만법, 우주법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방편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며 이치의 성품이 항상 적멸함을 이름하여 지(止)라 하고, 적멸하며 상상 비추어 방편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한다. 관이므로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이므로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이라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아니하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곧 불가사의한 지와 관이니라.
권(權)이란 방편이고 실(實)이란 실상이므로 권실(權實)이란 방편과 실제의 두 상대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觀)이란 용(用)으로 보아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는 체(體)로 보아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首楞嚴)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불과 빛의 관계처럼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보통 중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이니 이것이 중도입니다.
지는 곧 본체의 진실함(體眞)이니 비추면서도 항상 적멸하고,지는 곧 인연을 따름(隨緣)이니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지는 곧 지(止)아닌 지(止)이니 쌍차쌍조이다. 지는 곧 부처의 어머니이고 지는 곧 부처의 아버지이며,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지는 곧 부처의 스승이고 부처의 몸이다.
체진(體眞)은 진공(眞空)에 비유하고 수연(隨緣)은 묘유(妙有)에 비유한 것입니다. 지(止)자체가 이대로 진실인데 진공이라 하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단공(斷空)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대광명이 우주를 비추면서도 항상 적적합니다. 이렇게 지는 진공이면서도 또한 수연(隨緣)이니 지를 전환하여 바로 작용하면 그대로가 수연이며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멸하다 해도 진공 이대로가 묘유이므로 적이상조(寂而常照)하고, 아무리 천만가지로 변동하고 무한한 활동을 해도 항상 적멸하여 조이상적(照而相寂)합니다. 이와같이 지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진공이면서도 묘유이므로, 지는 지가 아니면서도 지가 되어(止卽不止止) 마침내 쌍차하고 쌍조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는 보통 쌍차만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쌍차 속에 근본적으로 쌍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쌍조를 제외하고 쌍차가 없으며 쌍차를 제외하고 쌍조가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여기에서 지 하나만을 거론한 이유는 지에 관(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관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를 곧 부처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 부른 까닭은 일체제불과 천하 선지식이 모두 이 도리를 알고 깨쳤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로 삼제제불과 역대조사의 부모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라는 것은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양변을 그치는(息二邊) 지는 곧 생사와 열반, 공과 유가 쌍으로 적멸하니라. 이 지는 의지하여 중도의 정을 발생하고, 부처의 눈이 활짝 열려 비추는 것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어 중도 삼매를 이루느니라.
천태교학에서는 지에 대하여 흔히 체진지(體眞止).수연지(隨緣止).식이변지(息二邊止)의 세 가지 지를 거론합니다. 체진지는 지에 의하여 망상을 내지 않고 혜안(慧眼)이 열려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보는 것이며, 수연지는 방편적인 거짓 마음(假心)을 발하여 법안(法眼)을 얻어 숙제(俗諦)를 보는 것입니다. 식이변지는 생사와 열반을 모두 멀리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취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것은 곧 생사와 열반의 양변입니다. 그러나 열반에 집착하게 되면 생사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다 버리는 중도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와같이 생사와 열반, 공과 유의 양반을 버리고 중동에 머무는 지를 바로 식이변지(息二邊止)라 합니다. 생사와 열반, 공과 유를 다 버리면 쌍적하여 중도의 정(定)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부처의 눈(佛眼)이 활짝 열려 시방 법계를 다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 지혜광명이 발현됩니다.여기에서 중도삼매를 이루어 성불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정등각한 근본 내용입니다.
중도제일의관은 교묘하게 네 가지 실단(四悉檀)을 사용하여 곧 일체종지의 부처눈(佛眼)을 얻느니라.
'중도제일의관'이란 불교의 가장 근본되는 관법을 말합니다. 사실단(四悉檀)의 실단(悉檀)이란 siddhanta의 음역으로 종의(宗義)·정설(定說)·성취(成就)라는 뜻인데, 사실단이란 세계실단(世界悉檀).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대치실단(對治悉檀).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의 네 가지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눈(佛眼)'이란 시방 미진수 세계를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혜안(大慧眼)·대법안(大法眼)을 말합니다. 이 불안을 성취하는 것을 정등각이라 하고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합니다. 즉 원교에서는 이변을 쌍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기도 하고 적조(寂照)라 하기도 하며, 이것을 성취하면 중도삼매(中道三昧)고 성불입니다.
마음이 중도를 반연하여 실상의 지혜에 들어감을 지(止)에 머무는 뜻이라 하니 실상의 성품은 곧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닌 뜻이다. 또 이 일념이 능히 오주(五住)를 뚫어서 실상에 도달하니 실상은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니다. 이런 뜻이 다만 한 생각 마음 가운데 있어서, 진제(眞諦)를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경에 말하기를 능히 모든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으나 대개 반야의 한 법이니 부처님이 여러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이름이 모두 원융하여 모든 뜻도 또한 원융하다. 상대.절대.대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하므로 장애가 있지 아니하며, 장애가 있지 아니하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다. 이것이 원돈의 교상(敎相)으로 지관의 체를 나타낸다.
'지(止)에 머문다'함은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 · 사혹(思惑) · 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분별한 것인데, 삼계에서 생사에 집착하게 하는 번뇌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그리고 일념이 능히 오주지의 번뇌를 다 끊어버리면 중도에 도달하여 바로 깨닫게 되는데, 도달된 이 실상은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니며,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뜻이 마음 한가운데 있어서 진제(眞諦), 즉 마음의 근본 자성자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차별되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 천차만별의 형상이 비치어도 밝은 거울이 요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성취하여 진제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간의 생멸상을 살피어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洞)하면서 공(空)하고 공(空)하면서 동(洞)하여 동 · 공이 완전히 상통해집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된 곳입니다. 여기서 중도라 하든지 열반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이러한 온갖 표현은 다 반야 한가지의 법을 여러가지로 말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92] 원교의 중도설 : 원돈지관 1967년 12월 25일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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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천태종의 중도사상
5. 원교의 중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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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ser-up5op8eu3y
    @user-up5op8eu3y4 күн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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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tsjung1
    @itsjung14 күн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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