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일제시대의 조선인들

국뽕 영화와 드라마에 의해 왜곡된 진짜 역사에 대한 이야기

Пікірлер: 6 900

  • @trinity1203
    @trinity1203 Жыл бұрын

    전 이미 내용중 상당수를 10년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더군요. 재미있는거 알려드릴까요 ? 그당시 사셨던 (10대 후반~20대 초반) 우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일제시대에 대해서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더군요. 외할머니한테 항상 들었던 말은 " 일본인들이 만든 교각이나 다리는 정말 튼튼했었다. " 이말 정말 많이 들었음. 이런 말 하면 친일파 어쩌고 하겠지만 당시 사셨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다지 잘살았던 집안이 아닙니다. 그냥 고만고만했던 집안임. 더 충격적인 증언은 당시 친할아버지 집안이 잠시 엄청 어려웠던 적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도시락도 못싸올 정도였음. 근데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할아버지를 위해서 도시락을 매일 싸와서 먹였음.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 너희 조선인은 너희 말과 글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라고 했었다죠. 이건 당사자분들한테 직접 들었던 말임. 나도 한때 엄청 반일이었는데 이후 무조건 맹목적 반일만 할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내 나이는 40대 중후반 입니다.

  • @user-cd8fm1cq6s

    @user-cd8fm1cq6s

    Жыл бұрын

  • @koreanchinese1836

    @koreanchinese1836

    Жыл бұрын

    민족말살 드립하는데 실제 당시 교과서는 조선어,일본어 함께 표기해서 가르침 ,고유 민속놀이까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 이렇게 온갖 거짓말 환타지소설같이 국가차원에서 조작날조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 당시 교과서가 분명 존재하는데 난 미디어에서 당시 교과서 보여주면서 민족말살 드립치는거 한번도 못봤음

  • @user-wq3nl9cj3y

    @user-wq3nl9cj3y

    Жыл бұрын

    ​@@koreanchinese1836 아~~ 일본은 한국의 은인이구나

  • @jkmk9248

    @jkmk9248

    Жыл бұрын

    개개인의 사례와 일본인 하나 연민으로 베푼 정 가지고 일제강점기가 살기 좋았다고 하시는건가요 저희 할머니도 일제강점기 사셨던 분인데 일본군에 의해 친척과 친구 모두 잃었습니다. 학교에선 일본어 안쓰고 조선말쓰면 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일본이 조선쌀 관리하면서 나중엔 쌀구하기도 힘들었다고하네요 어디다서 일본놈들 입장에서 합리화시키는 개소리 하지도 마세요 쪽팔립니다

  • @천라이언

    @천라이언

    Жыл бұрын

    더럽게 편협한 인간이네 ㅋㅋ

  • @hong2743
    @hong274310 ай бұрын

    저희 외할아버지가 겪으신 일입니다.외할아버지는 10살즈음 일본에서 광부일을 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인원 할당재여서 외할아버지의 형님이 뽑혔습니다.그런데 형님께서 다리가 부러져서 못가게 되셨고 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였지만 강제로 가시게 되었습니다.일본 도착후 낮선 환경에 울고 있으니 일본 책임자가 와서 자기집에 데려가서 잔심부름을 시켰습니다.지금으로 따지면 파출소 소장정도의 일본인이었다고 하더군요.말도 잘 안통하고 부모님이 보고싶어서 울고 있으면 걱정하지마라 기회가 되면 꼭 집으로 보내주마라고 했답니다.그리고 몇개월뒤 고국행 배에 태워서 차비하라고 돈까지 쥐어주며 보내주엇다고 참 고마웠다고 했습니다.이걸듣던 광복절 특집으로 취재했던 기자가 어린나이에 집안일 하느냐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여쭤보니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힘든거 하나도 없었어.마당 쓸고 담배 심부름이 다였고 밥도 맛있었어라고 해서 기자를 당황하게 만드셨습니다.물론 기사에는 잘해준거 빼고 나머지들만 썼더군요 그냥 직접들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했습니다.일본의 수탈은 맞고 우리나라와 사람들을 이용한 악인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거 말하고 싶었습니다

  • @2-ru8xp

    @2-ru8xp

    10 ай бұрын

    그렇지 이게 맞지

  • @user-ho7jg8lm1l

    @user-ho7jg8lm1l

    10 ай бұрын

    네 착한 일본인들은 독립군을 숨겨주기도 했었습니다.

  • @user-he8ui1rq6w

    @user-he8ui1rq6w

    10 ай бұрын

    물론 일본인 개개인과 일제 자체는 달랐으니까요 님글에서도 보이듯 인원할당제로 그 대상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린나이까지 강제징용시키는제도 같은게 잘못됐었네요

  • @abcde4677

    @abcde4677

    10 ай бұрын

    사람 사는곳은 다 똑같음. 개개인끼리 지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게돼는거고 실제로 그당시에 한일결혼도있었음.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온 일본인들 대다수가 일본에서 밀려난 약자들도 많아서 약자에 배려하는 사람들도있었음. 그리고 실제 일본에서 군국시대에대한 불만도엄청 많았음.

  • @dearyu6329

    @dearyu6329

    10 ай бұрын

    @@user-he8ui1rq6w 강제징용 강제 라는 말은 할아버지 입장에서 였겠죠. 보통 그시대에 다 가난 했으니 부모가 형 대신 가라고 해서 어린 나이에 가게 된 경우 일겁니다. 당시에 일 하러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널렸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죠.

  • @user-jd2yq7up6o
    @user-jd2yq7up6o6 ай бұрын

    작고한 조부외조부의 말씀과 미디어 역사교과서와는 너무나도 다른 점에 혼란이 있었는데 60이 되어보고 조각을 마추어보니 죽일넘들은 내조국의 정치가와 권력자들이었다는게 한숨이 나오네요

  • @user-eb7sd5ib2f

    @user-eb7sd5ib2f

    19 күн бұрын

    뭐 어쩔 수 없죠 작고한 조부외조부와 같은 수많은 능력없는 개돼지수준의 짐승들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다가 국가 팔아서 친구 가족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했으니 뭐 본인에게는 기회다! 나는 잘살았다! 살기좋아졌다! 라고 개처럼 징징거리겠죠

  • @user-nq5my1xy3b

    @user-nq5my1xy3b

    9 күн бұрын

    비슷한 느낌, 뒤늦게 속았다는 허탈함을...

  • @user-yi4cm4di3t
    @user-yi4cm4di3tАй бұрын

    오늘날 북한이 딱 조선시대 모습이라고 보면 됨..........

  • @user-hk2lr8ln7q

    @user-hk2lr8ln7q

    18 күн бұры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문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밖에 쓰여 있지 않지만, 만약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조약을 만드는 사전 회의(1951.5.2)에서 독도를 일본 영역에 포함한 사실이 표면화한다.절대로 ICJ는 피해야 한다.

  • @user-nq5my1xy3b

    @user-nq5my1xy3b

    9 күн бұрын

    후조선 고종 김정은이죠.

  • @moon-yk2wc
    @moon-yk2wc Жыл бұрын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력하며 살아갔던 조상님들 존경합니다.

  • @rtyffg3

    @rtyffg3

    Жыл бұрын

    이시대의 진정한 승리자들이죠

  • @scomplicated

    @scomplicated

    Жыл бұрын

    그런 사람들을 친일파로 묶어서 비난하는 게 좌파들의 역사관이죠. 그래서 전 찐 좌파들을 매국노라 생각되요

  • @user-ys1tp4js3s

    @user-ys1tp4js3s

    Жыл бұрын

    시발 친일파들 영상들이 들끊네..

  • @fgjigg4717

    @fgjigg4717

    Жыл бұрын

    조선시대때랑 북조선때가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을듯

  • @dehwankim2269

    @dehwankim2269

    10 ай бұрын

    @@fgjigg4717 통일신라와 고려가 가장 인구 몰살이 많았음..조선시대는 아주 양호한 편이고 백제가 가장 나았음..

  • @user-sn3jc9rr2b
    @user-sn3jc9rr2b Жыл бұрын

    대다수의 국민들은 언제쯤 국뽕환타지에서 벗어날수있을까요.. 원재님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영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바라고 응원하겠습니다.

  • @travelingjo

    @travelingjo

    Жыл бұрын

    중공의 녹봉을 받아 쳐먹고 기생하는 정치인들, 일본을 까야만 먹고사는 정치인들부터 퇴출시켜야합니다.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여지껏 당하기만 했으니 얼마나 열등감이 강하겠습니까..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봐줘야 합니다.

  • @우엑

    @우엑

    Жыл бұрын

    자료도 안보여주면서 그냥 대충 찾아봤다 이런식이면 왜봐요?ㅋㅋㅋㅋㅋ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피해의식과 판타지로 점철된 집단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user-rt5kk6hm7y 여지껏 힘 없어서 남 나라 정벌 한번도 못해놓고 남 나라에 쳐들어가지 않은 도덕성 같은 개소리나 하며 정신승리나 하는 민족임.. 북한은 러시아 중국에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노리개고.. 남한은 선진국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기술과 영향력은 일본에 갈굼당하고 미국에 외교 금융부터 갈굼당함.. 이러니 열등감 폭발 할 수 밖에

  • @jlee4918
    @jlee49184 ай бұрын

    저도 친구 할머니나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일제시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항일 영화들에 묘사가 많이 과장됫다는 생각은 많이 했었습니다. 현대 고 정주영 회장이 불법(...)으로 차량수리사업소를 차려서 신고를 당했는데 일본인 경찰서 서장에게 찾아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지금 상황이 절박하니 봐달라고 비니깐 그럼 신고안당하게 천막으로 가리고 하라고 하면서 학을 때면서 가라고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순사들이 미디어가 묘사하는거만큼 잔혹했다면 법을 어기고도 저렇게 찾아가서 봐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상상이나 할수있을까 의문이 들더군요.. 물론 어느정도 멸시나 차별이 있었지만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차량사업소 차리기전에 정미소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는데요 전쟁이 심화되면서 쌀을 탈탈털어가면서 정미소 사업을 접어야하긴했습니다만.. 이땐 일본 본토고 조선이고 전쟁이다 해서 쌀이며 집안에 쇠로된 도구며 다털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보며 일본인 주인공이 징집전 빵집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온갖 기자제를 전쟁 자원에 쓴다며 다털어가서 빵집 문닫고 허탈해하는 과거 회상씬도 잇지요. 순사보다 좀더 고압적이었던 일본 헌병들이 협조를 안한다고 평민들을 개패듯이 패는 장면은 일본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묘사됩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도시한복판에서 어린아이를 총으로 쏜다라.. 말도 안됩니다. 17세기 센코쿠 시대라면 가능할수도있겠네요.. 저는 일본을 미화하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을 미화하는게 아닙니다. 그당시 일본 평민들의 삶만 보아도 인권유린과 무사도니 황국신민이니 하면서 개인의 존엄을 자근자근 밟아대던 시절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면서까지 일본을 악마화하는건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를 가르킬때 과장없이 좀더 객관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다루면 좋겠습니다.

  • @user-sd5tp8vk3o
    @user-sd5tp8vk3o8 ай бұрын

    영상의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앞부분에 민중이 일본에게 대규모로 반발을 한 것이 3.1운동 뿐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은 지극히 수동적인 민족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수많은 비밀결사, 독립운동 기지 뿐 아니라 6.10만세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나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계열, 민족주의 계열, 학생단체 모두가 힘을 합쳐 만세시위를 계획했고, 민족주의 천도교와 사회주의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사전에 발각되지만 학생단체만이 남아 순종의 장례식에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주도자로서 잡혀간 학생이 200명이 넘습니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도 3.1운동 다음가는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개성, 인천, 원산 뿐 아니라 농촌지역까지 퍼져나갔고 전국적으로 320개교에서 수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을 자료만 조금 찾아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3.1운동 뿐이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을 부정하시는 느낌이 들어 남겨봅니다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3 күн бұрын

    늘 교묘하게 감추고 왜곡하고 지우려하는게 일본인들 종특 입니다. 역사를 까면 깔수록 우리 문명의 발 밑에 있어야 하니 책도 태우고 말도 못하게 하고 중요 사료들을 훼손하고 민족정기 끊는다고 말뚝박고 아무튼 모든 천박한 짓을 다 한 나라가 일본이고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온갖 패악질을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 입니다.

  • @user-sp3nk2lx1l
    @user-sp3nk2lx1l Жыл бұрын

    개인적으로 울컥했던 영상입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단순히 일제에 대한 증오심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던 개인들과 그 개인들이 해방 후 이룩한 산업화와 그 결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 @seungseo0616

    @seungseo0616

    Жыл бұрын

    30년 출신 울 할머니 말로는 어릴때 일제 때문에 힘들었던것 보다는 그냥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삶 자체가 힘들었다고 함.

  • @leehyangje

    @leehyangje

    Жыл бұрын

    신문기사 언론보도 : 신라시대?부터 믿을 수 있는 자료인지... 일본이 100개를 잘했다고 쳐도 위안부 1개는 문제이다. --> 일본이 사과하고 1조 기금을 마련해서 한일이 화해하고 --> 한일+대만=아시아연방을 꾸릴 수 있을지...

  • @user-kp3ty2cb3v

    @user-kp3ty2cb3v

    Жыл бұрын

    @@leehyangje 예를 들어서 100개라 한건 알겠는데 그래도 예시가 비약이 심하신듯

  • @jbe5336

    @jbe5336

    Жыл бұрын

    ​@@leehyangje 일제시대가 되면서 은행업이 본격 시작되었죠 위안부, 강제징용 등의 왜곡과 오해가 당시 은행업의 하나인 고리대금을 당시의 범죄자들이 악용해서 생겼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한국인은 같은 한국인에게 지독하게 악랄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한국인의 국내 국외 범죄 기록들을 보며 그 당시 격동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그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했던 범죄자들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3자만 없다면 얼마든지 악랄한 짓을 해도 거리낄게 없는 범죄자들의 시대였죠

  • @jesuslovesyou3228

    @jesuslovesyou3228

    10 ай бұрын

    @@seungseo0616 삼정의 수탈을 겪어보고 그런 말을 해보기 바랍니다. 황구첨정, 백골징포, 노력해도 신분 때문에 평생 부모와 신분을 원망하며 살아가본적이 당신들에게는 있었습니까?

  • @user-jm7tk7vf3w
    @user-jm7tk7vf3w Жыл бұрын

    시대에 억압받으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조상들이 아니라 힘든 시대속에서도 자기 삶을 개척해가는 하나의 개인으로써 일제시대를 살아오신 조상분들을 존경합니다. 이게 진정한 민중사학이 아닐까요?

  • @user-fp2bh5td7d

    @user-fp2bh5td7d

    Жыл бұрын

    이정도면 조상을 위해주는게 아니라 우습게보고있는거임ㅋㅋㅋㅌㅋㅋㅋㅋ

  • @jaekim906

    @jaekim906

    Жыл бұрын

    근데 오해하면 알될 게 자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하나의 개인들은 당시 조선에서 극소수였습니다. 조선인 대부분이 농부였거든요 그것도 소작농. 영상에도 나왔듯이 당시 소작농들의 생활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전국적인 소작쟁의가 발생했거든요. 열심히 자기 삶을 개척하신 분들 응원하고 존경하면서도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조선민중들의 힘든 삶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 @parkgreat8619

    @parkgreat8619

    Жыл бұрын

    @@jaekim906 조선에선 소작농 탈출도 힘든시기였는데. 조선왕조때는 세도정치로 남자들은 일자체를 않했다고 해봐야 다 뺏어가니깐

  • @bradleysbullm1673

    @bradleysbullm1673

    Жыл бұрын

    @@jaekim906 그런 삶들 모두를 조명하는 게 진정한 과거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대다수의 어렵고 평범했던 사람들과, 상황을 타개하려는 열쇠를 쥔 사람들 모두요.

  • @user-lv7xv6fc2u

    @user-lv7xv6fc2u

    Жыл бұрын

    @@jaekim906 소작은 일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 지주와 소작계약을 해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사회주의 정권처럼 조선시대 토지소유자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강탈해서 재분배할 수는 없는 것이죠. 일본도 1945년 11월 기준으로 전체 농지 중 소작지가 46%였고, 일본 전체 농가 600만호 중에 72%에 해당하는 430만호가 소작농가였습니다. 조선인을 차별해서 지주소작관계를 유지시킨 게 아닙니다. 일본 본토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35년 동안 인구가 약 900만명이나 증가했습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60%나 더 증가했으니, 소작지 쪼개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주소작관계에 의한 소작농의 빈곤함이 빈농 출신 일본 청년 장교들의 분노를 불러와 쿠데타를 여러 차례 일으키고, 후일 군국주의 정권이 들어서 청년 장교들이 소작농을 위한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조선총독부도 일제 말기에 농지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이승만의 농지개혁까지 이어지는 것이고요.

  • @bbbaaa1234
    @bbbaaa12347 ай бұрын

    호밀밭 구독자가 어느새 23.7만이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발전하기를 응원합니다.

  • @user-jc8dd7fg4u
    @user-jc8dd7fg4uАй бұрын

    그 역사 속 위대한 개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큰 본이 되는 것 같네요.. 늘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user-je4jd4ju6y
    @user-je4jd4ju6y Жыл бұрын

    전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기힘든 파란만장한 성공신화, 대한민국 건국후 지금까지의 역사가 정말 위대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 @user-zxcvna

    @user-zxcvna

    Жыл бұрын

    박정희대통령 덕분이죠 만약 남한에 공산당이 자리잡았으면 지금의 북한처럼 거지국가로 전락했을 겁니다

  • @lilillilllilil

    @lilillilllilil

    Жыл бұрын

    제 인생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국뽕이 뭔지 알겠음. 마지막에 이 말을 듣는 순간.. 역사 교과서로 아무리 배워도 깊게 와닿지 않았던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역사에 담긴 진정한 의미, 정체성을 깨달았달까

  • @dolphinpark2264

    @dolphinpark2264

    10 ай бұрын

    1919.3.1일 3.1운동후에 국내외에 8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생기고, 이중에 6개의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추대했음. 상해임정 도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이었고, 해방후 1948년까지 김구와 이승만은 노선이 자유민주주로 같았고, 한길을 같이 가게됨. 1919~1921년에 조선의 독립군은 주로 만주에 흩어져서 활동하였는데,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전부 만주에서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홍범도와 이동휘와 여운영과 러시아계무장단체가 합동작전으로 조선 독립군을 거의다 몰살시킴. 그리고, 죽이지 못한 독립군은 재판을 열고 여운영이가 배심원을 하고 홍범도가 재판장을 하면서 모조리 총살시킴. 이것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함.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800명이 총살되고, 1000여명이 소련공산당에 강제편입되고, 김좌진장군과 소수만이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오게 됨. 홍범도가 대장격으로 있던 고려혁명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정신의 함양, 즉 공산화를 위한 혁명교육에 앞장섯고, 홍범도는 레닌으로 부터 소련혁명정권에 협조한 대가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음. 홍범도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되고, 소련군 대위가 됨. 이후 홍범도는 1937년 9월 레닌과 사이가 안좋았던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고 그곳에서 극장 경비 등의 일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범도.이동휘. 여운형. 소련공산당이 합작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조선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종료되어 1921~1939년까지의 조선 독립군의 활동이 끝나게 됨. 그후 1940년에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중경에 임시정부 김구가 함께 새롭게 광복군을 만들게 되는 것임. --유튜브 글 인용--

  • @haasmanuel213

    @haasmanuel213

    9 ай бұрын

    @@dolphinpark2264 막줄에 모든 답이 나오네요 ㅋㅋㅋ 유튜브 글 인용 ㅋ

  • @user-tb5eq9lx4b

    @user-tb5eq9lx4b

    9 ай бұрын

    우리나라가 총이 있긴 있었나요? 다들 구소련제 아니면 일제총이었을듯... 제대로 사격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다... 정말 웃기는 얘기죠. 그래서 영화를 보고 역사를 배우면 바보가 되는 법. 히로시마원폭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일제치하면 오히려 김일성체제보다는 100배 낳았겠죠) 6.25때도 군함1척 없었던 나라이거늘...유엔군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유는 있었을까요?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김정은이 밑에서 개고생 하면서 살았을터....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nowill3943
    @nowill3943 Жыл бұрын

    선악의 개념으로만 배웠던 일제 강점기엔 영상에서 지적해 주신 ‘위대한 개인‘ 들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좋은 영상 매번 감사드립니다.

  • @qq-bz9hi
    @qq-bz9hi6 ай бұрын

    맞는말만하네 구독간다

  • @user-ok4kl9tr8r
    @user-ok4kl9tr8r6 ай бұрын

    영상 잘보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 @Turnright868
    @Turnright868 Жыл бұрын

    저희 돌아가신 할머니가 1920년대 생이신데 약주한잔하시고 기분 좋아지시면 일본 민요를 부르시곤 하셨습니다 저희 부모님 께선 타박을 하셨는데 그럴때마다 할머니께선 '일본놈들은 나쁜놈들이라'라고 기계적으로 되뇌이셨죠 그런데 매해 노인대학에서 일본 여행을 가는건 아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가셨습니다. 노인대학에서 가는 것이니 당연히 할머니 수십명이 다같이 갑니다. 저희 할머니는 일찍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젊어서 부터 혼자 5남매를 키우시느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돈한푼 허투로 안쓰셨는데요 유일하게 일본만 가시면 손톱깎이, 부채,가끔은 작은 가전제품 등등 을 사오시곤 했습니다 이런 저희 할머니가 혹시 친일파,친일부역자,혹은 일제시대에 고통받은 피해자 이실까요? 할머니께선 고생을 워낙 많이 하셔서 젊었을때 고생한 이야기를 입버릇 처럼 하셨는데 일제 시대때 고생한 이야기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전쟁때 너그 애비 퍼뜩 낳고 갓난 애기 들고 뛰어서 도망 다녔어' 라고 6.25 전쟁때 이야기, 전후에 고생한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 @koreanchinese1836

    @koreanchinese1836

    Жыл бұрын

    오래전 여행사 근무했던 사람말로는 실제 할머니들 손에 종이에 일본 주소 적힌걸 들고 있어서 나중에 알고보니 학교다닐때 학교 선생님 찾으러 많이 일본간다고 했어요 ... 일본인 교사들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학생들 지도 해서 일제시대 학교다닌 학생들이 죽기전에 학창시절 은사 찾으러 간다고

  • @hoonsuh6345

    @hoonsuh6345

    Жыл бұрын

    울 큰할아버지도 사이판징용갔다왔는데도 돌가시전에 일본여행가서 그시절자루소바 추억하며 드시던거 생각남~ 악감정보다 추억이 많았던게 신기했음

  • @user-fb6uy8ff1o

    @user-fb6uy8ff1o

    Жыл бұрын

    @@koreanchinese1836 님 닉넴이? 무슨 뜻이예요?

  • @lizjyh

    @lizjyh

    Жыл бұрын

    일제가 좋았다 안좋았다를 떠나서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개개인한테 일제는 신문물이자 그저 새로운 환경이었던거같아요. 정치적인 목적을 개개인은 모르잖아요. 그당시 일본인들도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을뿐.

  • @user-fp2bh5td7d

    @user-fp2bh5td7d

    Жыл бұрын

    @@user-fb6uy8ff1o 한국의 집단의식이 중국수준이리는 뜻 ㅇㅇ

  • @hypergyanko1405
    @hypergyanko1405 Жыл бұрын

    우리는 수동적인 노예가 아니였습니다. 출신과 환경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개척자 였습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조선매국노 왕실의 노예가 아닌 일제 식민지 노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위대한 개인!!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그 자체 입니다. 이번 영상 감사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9 ай бұрын

    갑오개혁때 이미 폐지됐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4 ай бұрын

    그래서 당신은?

  • @user-ck9zr8uw4n
    @user-ck9zr8uw4n5 ай бұрын

    좋은내용 감사합니다. 전 단순하게 이런생각이 드네요...멸공.

  • @teacherlee808

    @teacherlee808

    4 ай бұрын

    그대는 단순 무식하네요. 북한에 가서 멸공이라고 외치세요.

  • @user-ko9zi2uf1b
    @user-ko9zi2uf1b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한국사를 배우고 있는 고1 입니다. 영상을 보고 제가 학교에서 배운것들과 기존에 제가 이해하고 있던 내용과는 달라 혼란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웠습니다. 영상에서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은 그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살아갔던 개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친일파는 어떤던건가요? 영상속 내용이 자칫하면 친일파를 옹호하는듯한? 변호하는듯한? 주장으로 변질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 내서 댓글 남깁니다.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kenahn1431

    @kenahn1431

    Ай бұрын

    영상에도 언급된것 처럼 일제시대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제치하의 교사나 공무원이 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일제에 부역했다며 친일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친일파로 보는게 맞을까요? 반민족행위와 친일은 구분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이미 나라를 잃었고 황국시민으로 태어나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바둥거린 사람들을 친일파라 불러도 될지 내가 그 때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해 봐야 할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조선은 망할만 하니까 망한 나라라고 생각 될거여요. 서양사람의 눈에 비친 조선사람의 모습은 하멜 표류기에 잘 나타나 있어요.

  • @daftbba

    @daftbba

    Ай бұрын

    일단 '친일파' 라는 단어부터 어떤지 생각해보세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라는 뜻이 언제부터 매국노와 동일어로 변질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무리입니다

  • @1_in_eternity

    @1_in_eternity

    26 күн бұрын

    님이 만약 조선이 일제와 병합된 이후에 태어났다면 조선인일까요 일본인일까요? 그렇게 태어났다면 당연히 일본식 이름이 있겠죠? 일본제국이 만든 교육과 사회 시스템안에서 자라날거구요. 그럼 조선이라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당신은 그 모든 시스템에 저항할까요? 아니면 개인의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시스템안에서 성공하고자 할까요? 역사적 관점이라는건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겁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시스템안에서 에리트 코스를 밟고 대통령이된 대표적인 사람이 박정희입니다. 한국에서만 친일파로 무덤에 말뚝박히고 욕먹고있지만요 ㅎ

  • @user-sv7tr2cp2o

    @user-sv7tr2cp2o

    16 күн бұрын

    안녕하세요, 꼭 제 글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성인이구요, 학생이 꼭 옳은 판단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친일파라는 것은 한 줄로 설명하긴 어려우나 “일본을 옹호하거나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을 옹호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과연 한국에 도움이 될까요?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면 반드시 일본의 주장을 받들겠지요. 식민주장을 받아드는 사람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매국노와 다름없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완용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죠. 이완용은 고종에게 한일합병을 2번이나 강조한 적이 있으며 그런 만행으로써 조선인들은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일제 시대는 표면적으로 봤을 때 많이 발전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세뇌 당했다고 요즘 학생들이 말을 하는데 정말 걱정 됩니다.. 그럼 어떤 부분인지 핵심을 알려 드릴게요. *경의선과 경부선: 일제는 한반도의 대륙침탈을 가속화 하기 위해 경의선과 경부선을 건설합니다. 또한 이것을 위해 러시아의 군수물자를 나릅니다. 절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인은 이것을 만드는 것의 노동자 였습니다. *전기: 조선의 전기회사는 일제의 국권강탈 이후 일한와사라는 일본의 회사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후 모든 이득은 일본이 가져갑니다. *군권: 일본에게 군권을 빼앗김으로써 독립의 마음만 품는 것도 바로 감옥행입니다.(윤동주 시인이 있습니다) *행정권,사법권,어업권 장악: 한일병합이란 아래 조선총독부를 세워 모두 강탈하고 어업권과 광업권을 행사해 바다까지 장악합니다. *토지 사업,가옥세,연초세: 수확하는 것은 일본인에게 넘기며 세금을 무작위로 걷습니다. *제일은행 화폐사용: 강제로 일본의 화폐를 사용케 합니다 * 차관: 조선에게 차관(빚)을 얻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재정을 완전히 뺏어 버립니다. 너무 많아서 못적겠네요. 이외에도 통신, 만주를 청에게 넘겨 줌, 교과서 불태우기, 유학 금지, 학살 등등 책 한권만 읽어도 다 나옵니다. 핵심을 봐야 압니다. 한일병합은 애초부터 국제법상 불법입니다. 한일병합의 문서를 보면 국새가 아닌 칙유지보가 날새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종 폐위시 강탈한 것입니다. 조약을 맺을 때는 국새를 찍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옳바른 판단을 하는 건 본인 몫이지만 인터넷과 서점의 책들 조금만 펼쳐봐도 다 나옵니다. 학교에서 괜히 가르치는 거 아닙니다. 제가 적어 준 목록 한번 씩 쳐보길 바랍니다.

  • @user-km2wm2ht3c
    @user-km2wm2ht3c Жыл бұрын

    무엇이 정말 애국인지 생각이 들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반일 탈출은 지능순 → 이완용 테크 타면 반일 탈출해봐야 다를게 없으니 이 함정에 안 빠지게 해야함

  • @user-vo2rm9bc1i

    @user-vo2rm9bc1i

    5 ай бұрын

    알면서 사람들 가스라이팅 시키게?

  • @user-vo2rm9bc1i

    @user-vo2rm9bc1i

    5 ай бұрын

    @Undittakdae 지감 당장 살아계시는 1900년생 말만 들어도 625보다 무서웠다는데 팩트는 뭔 팩트야.. 은근 끼워맞추면서 현실이 믿기힘들정도로 아픈 역사들을 좀 현실성있게 거짓말 매꾸면서 나라깎는 게 쟤네들에 할 짓이란다..

  • @user-vo2rm9bc1i

    @user-vo2rm9bc1i

    5 ай бұрын

    @Undittakdae 저게 사실이면 조선인들은 왜 해방 된 직 후 꽹가리 두들기며 좋아했을까..? 돈많은 극소수 제외하면 얼마나 공포스러웠던 땅이였는데

  • @doejohn539

    @doejohn539

    4 ай бұрын

    꽹가리치며 좋아했다는 증거 있음?​@@user-vo2rm9bc1i

  • @hoonsuh6345
    @hoonsuh6345 Жыл бұрын

    늘 레퍼런스랑 참조자료를 명기해주셔서 감사~~ 증말 김의겸장경태털보랑은 품격이 다르구만❤❤

  • @mna833

    @mna833

    Жыл бұрын

    ㅋㅋㅋ 북한 : 미제놈들이 우리인민들을 총갈로도륙낸다우 ~ 남한 : 일본놈들이 우리 조선인들을 학살한다! 전라도: 경상도군인이 전라도사람들을 학살한당께요 ㅋ

  • @minimini7462

    @minimini7462

    Жыл бұрын

    ㅋㅋㅋㅋ ㄹㅇ ㅋㅋㅋ

  • @user-fb1nk3wv1e

    @user-fb1nk3wv1e

    Жыл бұрын

    일제는 물론 다른 침략국도 마름제도를 두고 통치햇다. 직접 지주가 통치하는게 아닌 소작농 중에 중간 관리자를 뽑아 간접 수탈. 군산에 잇엇던 하야시인가 하는 원숭이는, 조선인 마름 1백명을 두고 수탈, 이 원숭이가 논을 보러 다닐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녓을 정도의 넓이. 꼬딱지 만한 나라에서,비행기로 돌아볼 정도의 논 규모라면 그 밑에 소작농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앗을까? 일단,소작료가 수확의 50퍼센트,거기에 물사용료,종자값,비료값,그리고 보릿고개때 꿔준 고율의 고리대금업. 추수끝나면 다시 제로, 또 꾸어서 생활, 그래도 안되면 유랑 또는 만주행, 전라도 농민들이 가장 만주로 마니갓다. 옥토를 놔두고, 그 쌀을 수출이라고 일본으로 보낸 자가 바로 일본원숭이들, 니들 원숭이 똥구멍 빠는 것들은 모두 마름의 후손들, 일본이 전쟁일으킨 미국은 잉여농산물을 바다에 빠뜨릴 정도의 수확, 일본이 뭘 믿고 전쟁을 일으켯을까? 지들 원숭이 농민들? 정부 잡아다 공장에 배치하고 기어다니는것 빼고는 전 국민 군수용품 생산에 동원햇던 원숭이들이, 뭘 먹고 살앗을까나? 침략국과 식민지 사이에 수출이란 단어를 쓰는 일부 마름 자손들, 식민지가 무슨 말인 줄 모르냐? 침략국gnp상승을 위해 자비심없이 탈취해 가는 자원수탈처.인력수탈처.다. 위생상향???? 부려먹으려면 안 죽게 해야지, 미국도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 마구마구 공급될때는, 쓰다 버리게 막 쓰다가 공급이 줄자 영양도 챙기고 위생도 챙기고 결혼도 시키고 해서 계속 노동력 공급받앗다. 원숭이들도 마찬가지.

  • @hoonsuh6345

    @hoonsuh6345

    Жыл бұрын

    @@user-fb1nk3wv1e 뭔 출처도 없이 드라마 소설만 쓸거면 꺼~~~~~즈🤣🤣 그래서 너는 이씨조선 아래서 계속 노비하고싶었오?? ㅋ

  • @mna833

    @mna833

    Жыл бұрын

    @@user-fb1nk3wv1e 네 잘들었고요 다음상상속의 작품 댓글남겨주세요

  • @yej_thing3496
    @yej_thing34967 ай бұрын

    8:21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역동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이끌어 나간 개인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독립운동가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junkim888
    @junkim8882 ай бұрын

    깨어있는 영상 감사합니다.

  • @winter413wind

    @winter413wind

    2 ай бұрын

    깨져있는 영상 이겠지. 머가리 깨졌노 ㅋㅋ

  • @GJeong
    @GJeong Жыл бұрын

    수동적인 노예가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개척자.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이런게 애국입니다.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Risk Boom 매국노 아닌 사람없음 정말 쓸데없는 프레임질

  • @user-zp1be1xm3i
    @user-zp1be1xm3i Жыл бұрын

    "대한민국 위대한 개인들의 이런 뜨거운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이 문구에 느끼는 바가 많네요 ㅠ 지금의 저 또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도록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 @user-vo2rm9bc1i

    @user-vo2rm9bc1i

    5 ай бұрын

    아 제발 속지좀마

  • @suholop1866

    @suholop1866

    5 ай бұрын

    @@user-vo2rm9bc1i 1차원 사고밖에 못하는 너나 좀 깨우치세요

  • @bonoss894
    @bonoss8946 ай бұрын

    북한이 하던짓을 일본군이 햇다고 구라치는 영화계 ㅋㅋㅋㅋ

  • @bbbaaa1234
    @bbbaaa1234Ай бұрын

    나라를 잃은 슬픔에도 조상들은 좌절하지 않았죠. '그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죠. 그 자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 @user-lu6tw8vd1v
    @user-lu6tw8vd1v10 ай бұрын

    저희 외할아버지가 1920년 생이신데 살아계실적 얘기 들어보면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랑 너무 달라 어렸을때 놀란기억이 많습니다. 일본선생님도 너무 친절했고 한국인들한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고 순사(군인?경찰?)들도 시민들한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같은 한국인들이 약탈하고 협박하고 이런게 많았는데 일본사람들은 너무 친절하고 잘 대우해줘서 오히려 편했다고 하네요

  • @flowerSun-yn6wy

    @flowerSun-yn6wy

    10 ай бұрын

    맞아요..제 증조친할아버지도 1903년생이신데 1993년도에 별세했어요..제가 1969년닭뛰인데 제가 군입대할때까지 4대가 같이지냈었거든요. 군연대장전역하시기도했는데...그분말씀이 차라리일제식민지때가 조선사람들에게는 살기평안했던 시대였다고말합니다. 군위안부얘기도하셨는데...지금종북좌익말대로라면 미군부대주변 유흥업소 여성들도 모두 종군위안부라고하시는말 들었던기억 ..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10 ай бұрын

    그러니까 조총련들도 일본 욕하면서도 지상낙원 북조선으로 안가고 일본에서 뻐티고 있는거죠.

  • @user-fd2kx4ri8r

    @user-fd2kx4ri8r

    10 ай бұрын

    저도 옛날 외할머니께 일제시대와 6.25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님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어?머지?' 이런 생각이였는데요~ 지금 님들 댓글 보면서 아 진짜 그렇구나 하는 싶습니다.

  • @tvsingercarpenter9857

    @tvsingercarpenter9857

    10 ай бұрын

    동감합니다~^^

  • @user-ul8bs3on8k

    @user-ul8bs3on8k

    10 ай бұрын

    희한하게 살아본 사람의 말보다 안살아본 반일좌파들의 말이 더 존중되는 답답한 현실.

  • @user-vy9bb6bs9c
    @user-vy9bb6bs9c Жыл бұрын

    끝에 멘트가 주어진 환경에 적극적이진 사람들이라 말이 공감됩니다. 자신의 모든것을 노력하고 개척하는것이 중요하지요. 잘못된것은 바로 잡고 반성과 앞으로 이런일이 없게 되는것이 이 시대에 우리들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 @user-il4xv9xt3c

    @user-il4xv9xt3c

    Ай бұрын

    그것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괜찮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해 너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인이 이렇게 사고력이 낮다니 실망이다. 일본에서 극우활동하고 있는 이집트 출신인 피피는 동아시아 중에서 독해력이 가장 낮은 것이 한국이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국을 공격하고 있다. 당신이 그것의 간증이 되어 버린 것 같다.

  • @user-gs3uy3xm8p
    @user-gs3uy3xm8p7 ай бұрын

    주류가 왜 주류겠나요 이 주장들이 다 나왔었던 주장들이며 이중에서 비주류들의 주장중 후속보도 반박보도와 부연설명으로 인한 신규 정보들로 주류가 차용한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최신 자료들이 아니며 이미 토론들은 다 진행된 후 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다들 자국민이면 누구나 심사숙고하며 깊게 생각해본 주제라 결국 이 영상을 보더라도 각자 마음속에 품은 그 뜻은 결국 바뀌지 않을거라 봅니다 이런 주장들이 '당신이 몰랐던' 이 아닌 '관심이 있다면 접해보았지만 세부 정보들을 추가하니 결국 원래 생각에 변함이 없었던' 이거나 '내가 내 뜻을 가진 구체적인 이유' 에 더 가까우니까요

  • @ISAIAH-KOR
    @ISAIAH-KOR Жыл бұрын

    어떠한 말로도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위대한 개인들입니다.

  • @구독누르면품번

    @구독누르면품번

    Жыл бұрын

    조선을 항상 피해자로 생각하고 조선인을 수동적인 인간들로 생각하는 반일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애국자가 맞나요? 이완용이 아니라 당신들이 더 매국노같아요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구독누르면품번 피해의식과 성역통제로써의 애도는 걍 세뇌된 조롱임ㅋㅋㅋㅋ ㅈㄴ우습게보는거지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구독누르면품번님이 이야기 한 반일정신병자들은 딱 민주당 졸개같이 보이는군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kw4ql5qx7u

    @user-kw4ql5qx7u

    7 ай бұрын

    ​@@user-wp7zb6lg5l이 중 일부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는데, 일본 반출량 대부분은 본토 양 부족에 의해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그러다 본토에 풍년이 들어 반출량이 줄면 지주들이 총독부 찾아가서 그 양을 늘려달라고 청원했죠. 그리고 소작농이 늘어난 이유 중 상당수는 공업화 전의 식량 수입에 의한 인구붐이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생활수준의 악화가 있었다면 대규모 기근사태로 인해 인구감소가 나타나야 하지만 어땠죠? 실제로 소작농의 증가와 소작료 증가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화전민/도적떼라는 대안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이 유지된 건 그만큼 생산성의 향상이 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죠. 그리고 생활악화 지표라고 들어주신 것의 시점도 춘궁기가 지나 한일합방 된 1910년과, 전시였던 1939/1943년인 것도 체리피킹 아닌가 싶네요. 또한 인구가 바뀐 모수 변화나 행정력으로 인한 암수 감소 같은 요인도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고요. 또한 자살은 여러 요인이 있고, 오히려 쭉 어려웠으면 못 하는 경우도 있죠.

  • @user-rx3ef9kd9s
    @user-rx3ef9kd9s Жыл бұрын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는 지금세대들에게 꼭 필요한정보입니다. 저도 80 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인데 최근에 이러한 역사왜곡에 대해서 제대로 들었던거 같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watermellon3

    @watermellon3

    Жыл бұрын

    ㅇㅇ 일제라는 악역을 만들어 왜곡질하는 드라마식 교육...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watermellon3 드라마가 짱임 자료 필요없음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watermellon3 이게 민주당 노리개가 되고 일본에게 비웃음이나 당하는데 동조한다는건 머리가 깨져도 모를듯

  • @user-ii4el7cc1z

    @user-ii4el7cc1z

    Жыл бұрын

    @@user-zk8so6lm7m 그것도 그거지만 앞으로 세대가 지금보다 교육이던 정치던 관심이 더 줄어든 것 같아요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user-zk8so6lm7m 사람들이 그렇다고 ㅋㅋ

  • @---psy
    @---psy6 ай бұрын

    저는 학창시절이던 2010년 자이니치들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기위해 교토 우토로 마을에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 중이던 시절 비행장 건설을 목적으로 총 2000명 중 약 1400명정도 조선인을 강제 징용 후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부려먹었습니다. 일본인과 동일한 조건이라면 일본인 비율이 많아야 겠죠? 600명정도는 관리자고 나머지 잡다한 인부 인력으로 사용된게 조선인 입니다. 흔히 아는 군함도도 마찬가지구요. 교토는 닛산 군함도는 미쓰비시가 건설 총책임업체 였죠. 현재 우리나라로 보면 방산업체로 생각하면 될듯합니다. 이 방산업체 상부에는 당시 전쟁을 진행하던 도조 히데키 총리가 있었던 겁니다. 가끔 알고리즘에 뜨는 우원재라는 이사람이 역사왜곡이다 어쩌다 하는데 참 개탄스럽습니다. 역사를 정확히 고증한것처럼 역사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데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됩니다. 우리나라는 승자도 패자도 아니였죠.자주독립을 못하였기 때문에 미 군정 산하에서 일본의 참략 역사를 다 지우지 못하고 지금껏 왔기 때문에 두 가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에 말씀하신것처럼 모두가 다 독립운동을 위해 살지 않았던 것은 동의합니다. 태어나보니 나라가 망해있었고 사람사는 곳이며 또한 살아야하니까요.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도 에이코(영자)라는 창씨개명을 했었으며 일본어를 배워야하고 일본인과 어울렸어야 했으며 이익을 위해 본토를 떠난 일본인들도 다 나쁜 사람만 있던건 아니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일제시대를 살거나 위안부강제 징용 및 여러 강제 징용에 대한 인터뷰는 수도 없이 많은데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분들도 본인이 원해서 일하러 간걸까요? 일본은 왜 군함도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지우려 하는걸까요? 위안부 피해보상은 왜 이루어진걸까요? 영상을 제작할때는 역사를 편향적으로 보지 않고 본인의 주관과 신념을 배제하고 제작했으면 합니다.

  • @user-nq5my1xy3b

    @user-nq5my1xy3b

    9 күн бұрын

    당신은 굳은 머리, 상식을 모르는군. 500년 히키코모리 탈출한 것만도 고맙다고 하쇼.

  • @sunghoonryu7263
    @sunghoonryu72633 ай бұрын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Mumumu858
    @Mumumu858 Жыл бұрын

    뭐랄까 이런 영상들을 보면 우리도 점차 역사를 더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며 성장할거 같아

  • @user-uv9gj3kb7f
    @user-uv9gj3kb7f10 күн бұрын

    진짜 제자신에게도 힘이되는 영상이네요 감사합니다

  • @user-jp6jd5id2n
    @user-jp6jd5id2nАй бұрын

    어릴적 보고 배웠던 일제시대 넘 다르네요

  • @ohy5248
    @ohy5248 Жыл бұрын

    젊은분의 역사관어대하여 감명을받습니다. 5~60대들이 못하는 일을 하시는군요. 그용기와지혜에 고개숙입니다~~

  • @72tube

    @72tube

    Жыл бұрын

    조선인들의 정체를 없애고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게 문제였다 라고 보시면 더 알기 쉽습니다. 쌀 팔아서 돈 많이 벌면 뭐해요? 다른 뭔가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 인식못하는 곳에서 다 갈취해가는데? 지금 정부랑 똑같애요~ 월급은 쥐뿔만큼 올려주고 물가를 대폭 상승하고. 그래도 노예가 아닙니까? 그냥 시대의 발전과 흐름에따라 조금 업그레이드된 현대판 노예죠 ㅋㅋㅋ 아님?

  • @jayyoung3201

    @jayyoung3201

    Жыл бұрын

    고개는 아재가 마누라 앞에서 숙이시는거구요

  • @Baeksajang

    @Baeksajang

    Жыл бұрын

    @@jayyoung3201 왜 시비냐 ?? ㅋㅋ

  • @dexterdog4976

    @dexterdog4976

    Жыл бұрын

    @@jayyoung3201 닥치고 묵념이나해라 너그덜 우덜우덜식으루다가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dltmfql222
    @dltmfql222 Жыл бұрын

    원재님 영상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 @HKYenergylab
    @HKYenergylab9 күн бұрын

    일제시대때 태어나서 일본가서 공부하고 조선에서 기업활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 이병철 회장이죠. 그 외에도 많죠.

  • @moonhalee9791
    @moonhalee9791Ай бұрын

    자칫 바바리안같은 민중들에게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이런 영상을 만들어 주신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일본에 관한 한 친한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넘지 못할 벽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일본에 관한 한 같은 한국인들과의 이성적인 대화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긴 저도 젊었을 때는 그랬죠. 나이들며 많은 경험을 하며 내가 알던 진실들이 편협된 지식이었다는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냥 제 삶의 궤적위에 맞 부딪쳤던 우연과 행운의 결과라고 해야할까. 역사적 사건들을 아전인수식으로 자신의 편향된 사상에 맞추고 더 고약하게는 아무런 역사적 고찰없이 그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의 농간이 지속되면 나중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역사적 사실처럼 기록되어 지는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KYH12
    @KYH12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는 역사를 그저 감정적으로 대하려고 함 역사는 냉철하게 여러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함 그저 우리들이 믿고싶어하는 역사만 믿는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te5le4gn9x
    @user-te5le4gn9x10 ай бұрын

    1913년생이셔서 일제시대.6.25다 겪으셨던 할아버지는 약주드시고 하시던 말씀은 어렵게 살았던 그 시대랑 전쟁때 말씀을 더 자주해주심ㅎ특히 빨갱이들은 진짜 못된짓많이했다고,😢

  • @teacherlee808

    @teacherlee808

    4 ай бұрын

    이승만이 여수순천에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였다오.

  • @teacherlee808

    @teacherlee808

    4 ай бұрын

    그 할아버지도 지금 태극기부대늙은이들처럼 무식했나보군요. 그시대 살았다고 아는것도 아니고 안살았어도 똑똑 하면 알지요. 지금 세대 살아도 지식이 하늘과 땅차이지요. 정말 나이먹고 무식하면 나라에 1도 도움 안되는 그저 식충이죠

  • @user-dy6li1cc8u

    @user-dy6li1cc8u

    3 ай бұрын

    독립운동가를 빨강이 라며 죽이고 ㅋ 지들은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ㅋ 대단하다

  • @user-cu7rz4kz9v

    @user-cu7rz4kz9v

    2 ай бұрын

    지금도 시골은 그렇게살아

  • @user-wo7iz6qr6c
    @user-wo7iz6qr6c8 ай бұрын

    용기있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진심으로 가르칠때 미래를 대비하는 교훈이 될 수있습니다. 정신대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일제강점기 문제입니다.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suholop1866
    @suholop18665 ай бұрын

    저도 할아버지께 들었던 내용이 일반 평민들은 조선시대때 비해 만족스런 삶을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기득권을 잃게 된 조선시대 관료, 귀족계층들이나 격렬히 반발했었겠죠.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일반 민중들은 다른얘기일 겁니다. 일본은 완전하게 국권을 침탈한 뒤, 본토의 것을 그대로 이식해온 점. 이걸 보아서는 조선을 철저하게 자국인양 취급했습니다 세력확장 야욕이 큰 일본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조선내의 민생을 어지럽고 궁핍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한 탄압으로 반란 내란같은 여지를 줘봤자 저들만 혼란스러울 일을 만들 뿐이고 국력을 소모시키는 일입니다. 오히려 조선에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겠금 해서 생산적인 영토로 만들어야 했죠. 일본 본토에서 하던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해 와 조선을 육성 발전시켜야 그들의 세력확장 야욕을 더욱 가능성 있는 일로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극단적인 일들이 사실이었으면, 일본은 구태여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자초한 격입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본 본토에 비해 조선은 우선순위가 차등이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지 않고 차별했겠지만, 대부분 상식선에서 조선을 컨트롤 한 것으로 압니다. 평민 민중들 입장에서는 사료로도 입증하듯이, 분명 조선말기에 고통받던것에 비해서는 훨씬 나았던 환경임에는 틀림없었으며, 철천지 원수로 받아들이는건 조선의 왕족 귀족 계층입장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정치적 도구로 쓰이던 반일감정을 업어서 과장 왜곡해 온 점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2 ай бұрын

    신분제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 @kkyuoo510

    @kkyuoo510

    5 күн бұрын

    와 근데 첫문단은 저희 할아버지가 겪으신 거랑 완전히 반대네요.. 저희 할아버지도 일반 평민이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얼마나 한이 많으셨으면 폭력당한 얘기나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가는 어린아이와 여성을 보셨다면서 잔혹함에 계속 눈물 흘리셨는데..그냥 씁쓸하네요..누구는 괜찮은데 누구는 아니었으니

  • @user-sj2hj6nl5o

    @user-sj2hj6nl5o

    5 күн бұрын

    ​@@kkyuoo510조선시대는 더했어 상거지 나라

  • @kkyuoo510

    @kkyuoo510

    5 күн бұрын

    @@user-sj2hj6nl5o 그렇게 멋대로 말할 건 아닌듯 할아버지 조선시대 때 살았는데 자기가 기억하는 조선시대때는 가난했지만 서러움은 없었다고 했음. 그냥 합병하면서 나라의 자존심 짓밟은 거임. 사람이 먹고 살기 편해졌어도 누가 개처럼 주인 발 핥으면서 살고 싶었겠냐. 할아버지 말씀대로는 노예는 없었지만 국민들이 일본의 노예같은 기분으로 살았다고 했음. 오히려 여기 댓글들과는 반대로 양반, 귀족 계층이 더 잘 살면 잘 살았다는데.. 그냥 살아온 환경에 따라 관점이 다른 것 같네. 분명 좋은 사람들도 많았고 좋아진 점도 많지만 그 안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건 뭐 반일감정으로 인한 역사왜곡 ㅇㅈㄹ 하면 안됨

  • @kkyuoo510

    @kkyuoo510

    5 күн бұрын

    @@suholop1866 아 조선시대가 아닌가 대한제국인가? 어쨌든 한일 합병 당시 10대 후반이었다고 했음

  • @sean7082
    @sean7082 Жыл бұрын

    한 10년 전 쯤 일제 강점기 때 살던 어르신들(지금 모두 돌아가심)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오히려 관점에 따라선 지금의 한국인들보다 일본에 대한 증오가 덜 하단 느낌이었네요. 심지어 3.1 운동 때 학생 시절이라 참여했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한 때 잠깐 뿐이었고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일본이나 독립을 신경 쓰기보다 자기 살기 바빴다는 느낌이었고요. 당시 인생 역전을 노려보려면 (?) 외국에 유학 가야 했다고 하죠. 미국까지 가려면 훨씬 돈이 많이 드니 현실적 선택이 일본이었다고 하고요. 사람 사는 것이 어느 시대든 비슷하다 싶었는데, 지금와서는 그렇게 유학간 사람들도 모두 친일파라고 하는 집단도 있고... 뭔가 감정이 너무 과열되었다는 느낌이더군요. 실제로 그 시절을 살던 분들보다도 말이죠.(물론 죽을 날이 내일 모레 였으니 묵은 감정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 식으로 너무 담담하게 말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 @user-mm1vv3fn6u

    @user-mm1vv3fn6u

    Жыл бұрын

    일제시기에나 조선인들 돈벌이 열심히 잘했지 조선시대는 수탈해가는 관리들 땜에 의욕 자체가 없었음,

  • @watermellon3

    @watermellon3

    Жыл бұрын

    살았던 이들의 진짜 역사를.. 기록하는 후대의 정치꾼들이 본인들의 실익에 따라 왜곡하곤 하죠.. 안타깝습니다

  • @younghuh3642

    @younghuh3642

    Жыл бұрын

    내 작은 할아버지도 일정때 아무도 꿈도꾸지 못하는 미국 유학 5년간 다녀 오셨다고 합니다. 물론 오셔서 총독부 고위관리로 계셨는데 지금 만104세 인데도 아직도 일본욕 안하십니다.할아버지 1018년생 이십니다

  • @user-rt5kk6hm7y

    @user-rt5kk6hm7y

    Жыл бұрын

    그 할아버지할머니들 다 일제시대 그리워함. 반일은 후세대 정치꾼들의 도구일뿐임

  • @watermellon3

    @watermellon3

    Жыл бұрын

    @@user-rt5kk6hm7y 그니까요..해석부분만 빼고 자료만 보면.. 살기 괜찮았던 시대 같은데.. 특히 일제때 인구수 늘어난것, 6.25는 수만명이 죽은것 비교해봐도.. 일부 사람들의 죽음(피해)을 가지고 너무 필요에 따라서 확대,과장하는 경향이 큰것 같아요.. 죽고살고, 살기좋고 나쁘고만 본다면 유교땜에 머리도 안자르고, 씻지도않고,길거리에 똥싸던 조선시대보다 훨씬 근대화되고 잘 살게됬는데 말이죠..

  • @Libertarian.
    @Libertarian. Жыл бұрын

    조선인들을 나약한 약자로 묘사하는게 조선인 개인들의 진취적인 삶에 대한 모욕이라는 관점은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영상 잘 봤습니다

  • @user-il4xv9xt3c

    @user-il4xv9xt3c

    Ай бұрын

    頭わるそーーーwww ホロコーストにあったユダヤ人達は反乱でも起こしたか? アウシュビッツにいるユダヤ人達は、強制労働させられていたが一度も反乱など起こしていないぞ。 こんな動画に一瞬で洗脳されるんだから、そりゃあ日本に国を奪われるわけだ。

  • @junomas1259
    @junomas12596 ай бұрын

    ㅋㅋㅋㅋ이래서 역사인식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부정적인 면을 덮을 수는 없겠지요

  • @dmsehf4438
    @dmsehf44388 ай бұрын

    너무좋은 동영상 입니다 오늘 역사인식의 거짓증언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자랑스런 내용입니다

  • @user-bn1tp4ub2c
    @user-bn1tp4ub2c Жыл бұрын

    솔직히 난 궁금함 애국심을 뺀 우리나라 한국사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 @user-xw2pq9pb3i

    @user-xw2pq9pb3i

    Жыл бұрын

    없어요ㅋㅋ

  • @changhyeonLee

    @changhyeonLee

    Жыл бұрын

    조선의 여러차례의 대기근이있지 않을까영

  • @user-rs5fx3bq2p

    @user-rs5fx3bq2p

    Жыл бұрын

    자국민을 노예로쓴 몇안되는 국가 나라의 발전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아 망하기 직전이었던 국가 이런 상황의 나라를 팔아먹은 인물을 배출한 국가 팔려버린 국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인물들을 친일파라 몰아가며 탄압하는 국가 자진해서 한 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며 아직까지 그런 작자들의 뜻을 이어가는 집단이 남아있는 국가 35년 침탈당했다며 피를 토하며 비난과 경멸을 쏟아내는 그 나라를 수백년을 자국민을 노예로 바치고 재물을 바쳐가며 굽신거리던 그 나라보다 미워하는 국가 심지어 어떤 말도안되는 인간 하나를 대령통으로 만들어 그 수백년간의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자는 발언을 대놓고 하게만드는 국가

  • @user-fp2jr5gi8f

    @user-fp2jr5gi8f

    Жыл бұрын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

  • @user-bn1tp4ub2c

    @user-bn1tp4ub2c

    Жыл бұрын

    양지가 있다면 음지가 있는법인데 진정으로 학생들을 교육 하려면 이 둘을 모두 배워야한다고 생각함 역사에서부터 교훈을 얻어야하는데 우리가 잘난것만 보여주니 잘난 교훈만 얻게 되는거 같음

  • @user-jt4zv3qo1f
    @user-jt4zv3qo1f Жыл бұрын

    영상 잘 봤습니다

  • @user-rf6pi5ox3j
    @user-rf6pi5ox3j6 ай бұрын

    좋은영상입니다

  • @user-yd8jg
    @user-yd8jg5 күн бұрын

    참 이런거 보면 100만년전 초기인류나 현재인류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 확실히 맞는것 같습니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동물은 무리지어 다니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습성을 가진 생물인데 급작스럽게 현대 들어서 개개인의것들을 중시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니 이런 오해가 생기죠. 심지어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문민정부 겨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그런 구조조차 없었는데. 서론이 길어졌는데 하고자하는 말은 지금의 관점으로 과거의 역사를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는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고 과거의 사람들한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역사서에 실린 것들이 최대한 왜곡이 되지 않도록 개개인의 의견보다는 일어난 사건들 위주로만 적혀있는거고요.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이렇게 일반인들도 자기 주장을 역사서처럼, 심지어는 역사서보다 더 영향있게 주장할 수 있으니 유튜버들 말이 다 맞는것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런 유튜브 동영상들도 다 개개인의 의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모든 부분에서 유튜브 영상 몇개 가지고 휘둘리셔서 편협한 사고 가지지 마시고 특히 역사같은건 귀찮으시더라도 직접 공인된 역사서 읽고 스스로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저도 인류 문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 소크라테스, 퀴리부인 천재인 부류는 아니라 기껏해야 노력해봤자 조금 기여하는 수준일거에요. 근데 저는 적어도 ss부대원, 731부대원 같이 선동되어 인류문명에 피해가 가는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 생각하고 개척해나가는 인생을 살아갈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나 안 살아가나 그건 여러분 자유지만 이 글을 읽으셨고 모종의 이유로 정말 답이 없는 수준이 아니시다면 앞으로는 평범한 유튜브 댓글러들 같은 짓들은 안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예전부터 유튜브에 댓글 다는 분들께 꼭 해드리고 싶었던 말인데 이 영상 댓글들 보니 정말 우리나라 민중들의 생각수준이 심각하게 걱정되어 드디어 댓글 남깁니다. 혹시나 이 글보고 오해하실까봐 말하는건데 이참에 똑같은 내용으로 반일영상, 친미영상, 반미영상, 친중영상, 반중영상 등등, 21세기 히틀러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본인들의 영향력도 고려하지 않고 만든 영상들이 보일때마다 들어가 댓글 남길 예정입니다. 제 애국심의 크기로서는 이게 우리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sgtjade
    @sgtjade Жыл бұрын

    원재님 영상들은 제게 항상 큰 가르침을 얻게 해줍니다. 감사합니다.

  • @ctz9995
    @ctz9995 Жыл бұрын

    호밀밭의 우원재 채널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user-fb1nk3wv1e

    @user-fb1nk3wv1e

    Жыл бұрын

    20세기 초,선진국 중 만족할만큼 식민지를 못 가진 나라.두 군데.독일과 일본. 네덜란드조차 가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과 서양국에 완전 초토화된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서 겨우 조선과 만주 대만 정도 가진 일본. 모든 침략국이 그랫듯이 이 지역을 블록화해서 폐쇄경제하에 수탈을 매개로한 약탈경제, 조선은 오로지 일본에세만 쌀을 수출할 수 잇고 오로지 일본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다. 인도가 오로지 영국에만 면화를 수출하고 영국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엇고 베트남은 오로지 프랑스에게만 고무를 수출하고 프랑스 공산품만 수입할 수 잇엇다. 영국.일본.프랑스는 각 국의 소금과 담배,술을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본국으로 가져갓다. 프랑스는 할당량을 매기고 강매하여 착취햇고 일본은 민간 술 제조를 금지하여 술을 강매하엿다.술에는 부가가치세를 매겨 세금으로 착취해갓다. 조선의 농부들은 새참으로 대형 술 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를 마셔야햇고, 몰래 집에서 막걸리를 빚엇다가는 10년 가까운 징역을 살아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햇다.

  • @user-yf8tf4bt3w
    @user-yf8tf4bt3w4 ай бұрын

    수준 대단하다~

  • @user-nc7sx2it4t
    @user-nc7sx2it4tКүн бұрын

    저희 증조부께서 당시 사업이 잘되셔서 큰 부를 이루고 사셨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신다거나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단지 사업 하시면서 자식들 뒷바라지 하고 지역사회 기부도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일본과는 실질적 얽혀 있는게 없었는데도 그런데 지금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보면 그 당시 부를 이루었단 얘기에 친일파 아니셨냐는둥 친일쪽으로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위대한 열사님들 처럼 독립운동에 무경험이라면 친일이 되는건지 참 안타깝고 희한합니다. 또한 저희 할머니(1920년생)께서 어렸을때 제 앞에서 일본어로 숫자를 읽으시길래 할머니께 신기해서 또 읽어봐달라고 하고, 할머니께서는 옛날에 학교에서 배웠고 일본순사도 봤었다 하셨는데 단지 그런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나쁜이야기는 없었네요. 오히려 6.25때 고생 하셨습니다.

  • @user-pp5zg8ud9y
    @user-pp5zg8ud9y Жыл бұрын

    꼭 끝까지 봐야하는 영상이네요. 좋은 영상 정말 감사합니다.

  • @dogfur_cleaner
    @dogfur_cleaner Жыл бұрын

    아직 유명하지않은 웹소설작가인 구독자 1인입니다. 언젠가 우원재님의 이러한 사실주의를 기반으로해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한 소설을쓰고싶어요. 지금쓰고있는작품을 마무리짓고나서 시놉시스가 통과된다면(될지는모르겠지만🥲)소식전하러 오겠습니다. 우원재님으로 하여 진실을 깨닫게되어 늘감사합니다.

  • @user-mr1zp9di1h

    @user-mr1zp9di1h

    Жыл бұрын

    응원합니다!!

  • @NPC-oi6pz

    @NPC-oi6pz

    Жыл бұрын

    과연 통과를 시켜줄런지......

  • @user-xo7oq6uq8l

    @user-xo7oq6uq8l

    Жыл бұрын

    와드박고 갑니다. 소식전하실때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응원합니다!!

  • @Mo0nTh

    @Mo0nTh

    Жыл бұрын

    응원합니다!!!

  • @Passing1202

    @Passing1202

    Жыл бұрын

    응원합니다!! 반일 종족주의가 많은 한국에서 이러한 진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통과 시켜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 @candykim5197
    @candykim51974 ай бұрын

    쌀을 수탈하던 때는 1930년대 중반 이후인데 기사는 문화통치기인 1930년 자료를 가져오셨네요..?

  • @whatishandle119
    @whatishandle1192 ай бұрын

    공감합니다.

  • @user-lh2tt2ge1g
    @user-lh2tt2ge1g Жыл бұрын

    유익한 영상입니다. 나는 X세대로 오십이 넘었습니다. 일평생 반일 감정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일제 때 징용을 다녀온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번듯한 사무실의 책임자로 일하며, 명절 때는 '일본인'들이 뇌물을 가져왔었다는 이야기를 마흔이 훌쩍 넘어서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들 조상님 절대 다수는 항일 투사도 노예도 아닌 생활인 이었습니다.

  • @ksmj1975
    @ksmj1975 Жыл бұрын

    이번 영상 소름이네요. 일본을 악마화하기 위해 위대한 우리 조상을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이 영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기 바랍니다

  • @user-qp8ki1nw8x

    @user-qp8ki1nw8x

    Жыл бұрын

    한번 더 당해보던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hyugi-papa

    @hyugi-papa

    2 ай бұрын

    당신같은 사람을 보고 대가리에 총 맞았다고 하는 겁니다.

  • @user-hs7wk1hv4y

    @user-hs7wk1hv4y

    14 күн бұрын

    @@ksmj1975 다시그날오면 제일 앞장서 친일할듯

  • @chloekim9031
    @chloekim90316 ай бұрын

    1. 그렇다면 3.1운동은 왜 일어난 것인가? 2. 학교에서 배우는 근대 문학들은 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가? 3. 왜 저 시대를 산 사람들은 일본을 철저히 악으로 보는 사회상에 반발하지 않고 침묵했는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일본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그만큼의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면 드는 세가지 의문입니다. 영상의 시각에 공감되고 신기하지만 이 세가지 의문도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요!

  • @yh8179

    @yh8179

    5 ай бұрын

    1. 협박. 같은민족의. 2. 일부분 발췌 및 선동. 3. 상놈 노비 중인 백정들이 대다수인 조선에 민주주의 개념도입.

  • @user-hq1mf6uq1i

    @user-hq1mf6uq1i

    5 ай бұрын

    영상에 다 나와있는데여;;😅😅😅

  • @chloekim9031

    @chloekim9031

    5 ай бұрын

    @@user-hq1mf6uq1i 엥..? 없는데욤..

  • @user-hq1mf6uq1i

    @user-hq1mf6uq1i

    5 ай бұрын

    @@chloekim9031 영상 제대로 보면 다 나오는데여;;

  • @chloekim9031

    @chloekim9031

    5 ай бұрын

    @@user-hq1mf6uq1i 타임라인 적어보세요 그럼 ㅋㅋ

  • @user-hi2mf9qp6h
    @user-hi2mf9qp6h6 күн бұрын

    "일본 농민 이야기 있으니까 쌀 수탈은 없었다"라는 주장은 생각이 1차원으로 단순한 사람이라는걸 증명하네. 전쟁 시기에 일본군, 일본 국민 모두 식량 부족을 겪었는데 쌀 수탈은 없었다? 수탈이 아니라 정당한 세금이었다고 우기고 싶은거겠지

  • @qwerqwer09
    @qwerqwer0922 күн бұрын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 @marycho3814
    @marycho38148 ай бұрын

    외곡된 역사를 꼭 바로 잡아 우리 다음 세대들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런 영상 많이 많이 올려 주세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6 ай бұрын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qk7id4wx2i
    @user-qk7id4wx2i4 ай бұрын

    일제를 직접겪은 이들 얘기는 일제의 강제적 수탈(금속류,연료용 송진,무화과등 군수물자) 행위는 44년경서 패망기로 기억하더군요.또한 조카 팔고,딸 팔은 애비는 봤어도, 우물가 처자를 총뿌리 들이대고 끌고 가는 건 못봤다고 하더군요.그런 세상은 아니었다고 하는 말에 놀랐습니다.

  • @bbbaaa1234
    @bbbaaa1234 Жыл бұрын

    영상 잘 보았습니다. 엔딩에 나오는 멘트가 인상적입니다. 호밀밭 영상들을 보다 보면, '개인주의'라는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구독자 14만 달성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호밀밭의 우원재 채널의 성장을 응원합니다.

  • @JenJTW
    @JenJTW10 ай бұрын

    자신이 약하면 병에 걸리듯이 스스로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 @kangmin20405
    @kangmin20405Ай бұрын

    5:03 완전 지렸다! 전율!

  • @user-sv7tr2cp2o
    @user-sv7tr2cp2oАй бұрын

    영상 내용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저는 요즘 책을 보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경제 발전에 대해서는 일본이 한반도의 경제권을 뺏어버리기 위해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기도 합니다. 그 목적은 대륙침탈과 러시아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함입니다. 또한 전기가 도입되었는데 전기가 도입되어도 대부분 일본인이 사용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발전한 건 맞지만, 한국의 경제 침탈과 박탈이 있었습니다. 핵심을 봐야합니다. 행정권,군권,사법권 등등. 판단은 개인의 몫입니다.

  • @user-xv9ku9pq5b

    @user-xv9ku9pq5b

    17 күн бұрын

    빚이 안 좋은것 만은 아님 정주영 회장이 열심히 영국한테 빌려 만들어낸 조선업 처럼 저신용 국가에 돈 빌려주는건 오히려 빌려주는 입장에서 리스크를 지는것

  • @user-sv7tr2cp2o

    @user-sv7tr2cp2o

    16 күн бұрын

    @@user-xv9ku9pq5b 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지만, 일제가 차관을 얻게 한 것은 대한제국이 빚을 짖도록 함으로써 경제(재정)의 주도권을 본인들이 완전히 행사하기 위함입니다. 조금만 알아봐도 나옵니다. 경제권 박탈과 함께 대한제국은 몰락합니다. 판단은 개인몫이니 뭐라고 하진 못하겠네요. 참고하세요☺️

  • @user-xg3hv9zs3t
    @user-xg3hv9zs3t Жыл бұрын

    참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이 간섭했던 당,명,청나라 시대에는 일본보다 했으면 더했지 국가에선 중국 악마화 선동은 안 하고 같이 싸워줬었다라는 동지론 만들쥬

  • @user-yy7yi3ey8j

    @user-yy7yi3ey8j

    Ай бұрын

    그러게 중국에 속국으로 산게 몇년인데 ㅋㅋ 그런거는 검색도 안해보는듯

  • @user-nh4px5qh2b
    @user-nh4px5qh2b6 күн бұрын

    우리 친가 할아버지가 합천임. 합천이 일본에 끌려가 강제 노동이 많이 있었던 곳임. 그중 한명이 저희 할아버지임. 어릴때 들었던 강제 노동에서 돌에 깔려 죽고, 배고파서 죽고, 사고 나서 죽고, 병에 걸려서 죽었던 사람이 많았다고 할어버지한데서 들었음. 그러나 그 때는 무슨 이야기인줄 몰랐음. 자라고 나서 그게 무슨 이야기인줄 알게 되었음. 아직도강제 노동에 끌려 갔던 사람에 대한 사과도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여지껏 신경도 안 씀. 이제 내나이 50을 바라봄

  • @user-di1iy5qd1z
    @user-di1iy5qd1z Жыл бұрын

    역사에 관해 흑과백이 아닌 철저히 회색영역에서 봐야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네요 항상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 @BR-2148
    @BR-2148 Жыл бұрын

    참 이런 영상 볼 때마다 반일(을 넘어 사실상 혐일)에서 벗어난 게 너무나 뿌듯함.

  • @user-qd8ou8oc8w

    @user-qd8ou8oc8w

    Жыл бұрын

    저도 반일, 혐일에서 완전 해방 전근대적에서 이제야 근대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

  • @younghuh3642

    @younghuh3642

    Жыл бұрын

    우리는 반일 이 아니라 극일 을 해야 하는데,,극일 한 좋은예 가 바로 삼성 이지요. 일본 가전 쑥대밭 으로 만든,,

  • @baiksungduk
    @baiksungduk4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 @leebynet
    @leebynet Жыл бұрын

    역사는 감정보다는 사실과 기록에 의해 정확하게 배워야 합니다. 저희 할머님이 1890년에 태어났는데, 제가 어렸을때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일제시대는 살기 좋았다. 6.25사변때는 너무 살기 힘들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할머님 말씀이 일본은 학교도 보내주고, 배고픔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6.25사변 중에는 죽을 걱정과 배고픔으로 너무 힘드셨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어렸을때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나이먹고 배워가면서 그 말씀이 이해가 되더군요.

  • @Turnright868

    @Turnright868

    Жыл бұрын

    저희 할머니랑 똑같으시네요 살아 계셨을때 항상 6.25 전쟁때 힘들었던 얘기만 하셨습니다

  • @아돌프히틀

    @아돌프히틀

    Жыл бұрын

    625사변도 일본이 만든것 ㅠ

  • @albuja80kg

    @albuja80kg

    Жыл бұрын

    @@아돌프히틀 🐕 소리 사절

  • @아돌프히틀

    @아돌프히틀

    Жыл бұрын

    왜냐면 일단 일본이 침략전쟁을 실행하여 중공의 승리에 크게 기여함. (중일전쟁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임시동맹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국공합작. 실제로 중일전쟁에서 중공은 자신들의 세력확장에만 집중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군은 마지막까지 공세를 당하며 군대들이 매우 약해짐) 두번째 이유는 일본에게 항복을 요청하였으나 끝까지 항복을 안하여서 독일을 마무리한 소련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침공함. 소련이 만주국경에 닿아있는 북한에 들어가면서 북한이 만들어진것.

  • @albuja80kg

    @albuja80kg

    Жыл бұрын

    @@아돌프히틀 일본 까기전에 쌉쓰레기 조선 정부를 먼저 탓하길

  • @user-kw4ql5qx7u
    @user-kw4ql5qx7u5 ай бұрын

    그런데 김영수 소위(김석원 장군 아들)에 대한 부분을 보면 확신하긴 어렵죠 맨 상부에서의 지침은 아마 그랬을 거 같긴 한데,현장에서 지켜졌을지는....

  • @user-fo5qz9lr6m
    @user-fo5qz9lr6m Жыл бұрын

    함경북도에서 피난 오신 친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아이들이 학교에서 차별을 받으면 일본인 선생을 찾아가 큰소리를 내셨다고 하셨고 이북에서 서점과 정미소 등 여러 사업도 하셔서 할아버지께서 일본 유학도 하신걸로 봐서. 이 영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실제 상황이 아니였을까 추측해 봅니다.

  • @user-fo5qz9lr6m

    @user-fo5qz9lr6m

    Жыл бұрын

    @@user-qx2bg9dv6i 맞습니다. 친가쪽은 이북에 건물 땅 재산 다 두고 공산당들 피해서 남쪽으로 피난 오셔서 고생 많이 하셨고 할머니께 어린 저를 붙잡고 반공 교육시키셨죠. 제 아버지는 금강산 관광을 가시라고 해도 공산당들 한테 돈 들어간다고 안가시구요. 역사 바로 잡아야 이 나라 바로 세워집니다.

  • @henrybae6207
    @henrybae6207 Жыл бұрын

    학교 역사교과서를 역사적 사료에 기반해서 완전히 새로 써야합니다

  • @younghuh3642

    @younghuh3642

    Жыл бұрын

    보수 든 진보 정권 이든지 간 에 절때 불가능 한 일 이지요.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2 ай бұрын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jc8dd7fg4u
    @user-jc8dd7fg4u7 ай бұрын

    늘 좋은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dd5kc1yi8l
    @user-dd5kc1yi8l4 күн бұрын

    아.....슬프다....이게 대한민국 채널이라니..;;

  • @k-donguk6678
    @k-donguk6678 Жыл бұрын

    기존의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심에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어렸을 때 일제시기에 태어나 사셔서 간혹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 일본인들 때문에 삶이 힘든 게 아니라 같은 조선인들 때문에 힘드셨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2차 세계 전쟁 때 집에 있던 놋그릇들까지 다 걷어가서 숨겨두기도 했었고, 이모님 중에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하셨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 @bluesky_above_the_shallow_hill
    @bluesky_above_the_shallow_hill Жыл бұрын

    일본이 조선에 도입한 문물과 재도 하애서 조선인들이 개인의 노력, 능력, 의지를 발휘하여 더 나은 삶을 산다고 하신 것은 매우 심도있는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들을 친일파, 매국노라 하는 이분법성과 정체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개인의 초점에 맞춰 그들을 '위대한' 개인이라 하신 것에 깊게 감명 받았습니다.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 @user-zi2uj4hj7e
    @user-zi2uj4hj7eАй бұрын

    영상 잘 봤습니다!!

  • @user-qf8uy9dv2u
    @user-qf8uy9dv2u7 ай бұрын

    어릴때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에겐 못물어봤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물어봤을때 물론 지금은 돌아가셨음 20년대 생이셨으니 일제시대에 태어나신분들이었고 외할머니는 자신이 학교에 다니고 일본어를 할수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음 당시 집이 부자였다는 상징같은것이라서 그리고 외할아버지에게 정말 살기힘들었는지 친일파가 많았는지 물어봤을때 솔직한 답변을 들을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이 좋아지니 당연하 그 시절은 지금이랑 비교도 할수없을만큼 힘들었더 하지만 6.25이후가 더 힘들었다 그라고 친일파는 없다 일제에 대항해 싸운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모든사람들은 그냥 일본인으로써 살았을뿐이다 그래서 친일파라는 말을 함부로 할수가 없다라고 하셨음 종친회장이셨으니 뿌리를 잊은분은 절대아니셨고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7 ай бұрын

    일제에선 이장 헌병이 끝이고 정치에 친일파 싫지않는다 거짓

  • @user-dk8mh4di7s
    @user-dk8mh4di7s Жыл бұрын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개인들이 자랑스럽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 뿐만 아니라, 사실 어릴 때부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모두 겪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본에는 별 감정이 없으신 데에 비해 .. 오히려 전쟁 당시에 공산당이 얼마나 잔인했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걸 종종 들어왔습니다 ... 당시에는 저도 일본이 절대악인 줄 알았기에 고개를 갸웃했었는데, 최근에야 막상 일제가 더 악하게 묘사되는 데에는 왜곡이 있으며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그나마 조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

  • @메가마인드

    @메가마인드

    11 ай бұрын

    과장된게 아니라 진짜 피해를 받았아요,지금도 피해를 받고 있어요

  • @htjh2678

    @htjh2678

    9 ай бұрын

    야인시대에서도 나오죠 이북출신 황병관이 왜놈들보다 더한게 빨갱이라고

  • @user-kh5fw7hn5q

    @user-kh5fw7hn5q

    6 ай бұрын

    우리 외할머니도 고향이 현재 북한쪽인데 똑같은 말 하셨음.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은 당신이나 당신 주변사람들한테 나쁜짓 하거나 폭력적으로 구는거 한번도 못봤다고 하심. 그런데 중공군들은 그냥 개돼지고 로스케들은 개돼지도 못되는 아귀들이라고 그러셨음

  • @user-ld2qx3qh5m
    @user-ld2qx3qh5m Жыл бұрын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나만 손해이지 남이 손해보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

  • @KOOL383
    @KOOL3832 ай бұрын

    0:55 어딘가 낮익은 얼굴.... D.P인가? 거기서 보았던 거 같은데

  • @dD-ns5bi

    @dD-ns5bi

    2 ай бұрын

    신병 강찬석(이정현)

  • @ace_geunam
    @ace_geunam6 ай бұрын

    사람 나름이다. 이익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나쁜넘들이 더 많았음. 울 고조 할아버지 독립운동하느라 피신하는데 증조할아버지는 집지키면서 일본순사 오먄 욕하먄서 꺼지라고 하니까 무서워서 갔다고함.

  • @unbreakable-tank
    @unbreakable-tank Жыл бұрын

    국사책을 여러권 읽어봤는데 짧게 한줄짜리로 오해살 만한 내용을 이렇게 영상으로 풀어 설명해주니까 이해가 되네요. 특히 마지막 메시지에서 우리 민족은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위대한 개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 여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해석이었습니다👍

  • @user-ui8zf2zx3b

    @user-ui8zf2zx3b

    Жыл бұрын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무수한 민간단체가 생겼다 소멸됐는데 그 이유는 예외 없이 "내부 분열"이었죠 이게 다 일제의 공작이나 이간질 때문이었을까요? 지금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자들이 대의大義보다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온갖 작태를 벌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조선시대 사색당쟁 후예답다는 한탄이 나옵니다

  • @rtyffg3

    @rtyffg3

    Жыл бұрын

    그렇죠 우리는 위대했습니다

  • @bleee1

    @bleee1

    Жыл бұрын

    @@user-ui8zf2zx3b 우리나라는 뭉치기 힘든 민족성이 있죠. 개개인이 영리하고 서로 올라가려는 기질이 있어서요

  • @user-dy6li1cc8u

    @user-dy6li1cc8u

    Жыл бұрын

    ​@@user-ui8zf2zx3b 민족주의 자들의 친미 사대주의 잖아요

  • @user-wl9yz3kp8j

    @user-wl9yz3kp8j

    Жыл бұрын

    ​@@bleee1 세계 어디가도 금모으기운동, 태안반도기름유출사건, LA폭동사건, 촛불집회같은 민족은 없다. 찾아봐라. 대단한 민족이다.

  • @user-rl4ig1si1p
    @user-rl4ig1si1p Жыл бұрын

    분노를 학습시키고 그 분노를 대물림 하는 나라

  • @user-ss6dt1yq2f
    @user-ss6dt1yq2fАй бұрын

    역사는 곧 인간의 행동을 기록한것이라 너무 입체적이라 힘드네요....

  • @wonkim5793
    @wonkim57934 ай бұрын

    내가 우리동네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총을 겨누고 " 이제부터 우린 형제다 " 라고 하면서, 그집 애들한테 돈벌어오라 시키면서 일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집 아내에게 아내로서 필요한 덕목을 가르치며 동시에 가계부정리하는 법과 회계수준의 기술을 알려주고 매일 아침점심저녁을 내가 원하는 메뉴로 달라고 하며 그집 가장이 벌어오는 돈을 일단 내가 받아서 반은 떼서 내가쓰고 나머지는 가족들에게 굉장히 공평하게 나눠어주고 필요하면 빌려도 주고 세는 돈없이 사용한다면 나는 그집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사람인걸까요? "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으니 괜찮네" 아닌겁니다. 바보가 아니면 그정도는 알아요. 망하더라도 내손에 망해서 정상인거고 남이 시키는대로 사는게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제아무리 여러부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고 좋은 영향을 준게 많다고 해도. 시작점이 " 강제 "인겁니다. 이 "강제" 라는 부분이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는거면, 지금도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로 살아야죠. 그리고 제가 적당히 삽질하는 가정이 있어보이면 칼들고 들어가서 능률있는 집으로 만들어도 좋은소리 듣겠네요 세세하게 일본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가 무슨의미일까요? 도움이 됐으니 안미워해도 된다? 그정도로 미워할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일부러 미워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나쁜짓은 나쁜짓인겁니다. 그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는 말을 가해자가 하는 수준이면 대화할 가치가 없는 수준인거겠죠. 생각보다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일본사람들 한국놀러와도 딱히 차별하거나 욕하는것도 아니죠. 그리고 경제통사나 공식적인 자료들 대다수가 생산량을 늘었으나 국내 소비량은 줄어든채로 유지됐습니다. 즉, 생산자체가 늘어났으나 그걸 조선인들이 충분히 필요한 만큼 소비한게 아닙니다. 의료시스템도 들어왔고 여러가지 사회제도적인 근대시스템이 들어왔죠. 그러나, 역사를 똑바로 보면 흐름상 일본이 와서 하지 않아도 그걸 해야하는 시대였습니다. 고종이 유약하고 힘도없고 구시대적인 사고관으로 똑바로 진행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은건 사실이나, 큰틀에서 합병 이전에 어떤 조선의 정치인도, 심지어 매국노들까지도 조선이 근대화적 체제를 만들어야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합병하지 않았더라도 국내소요와 상황들이 시간이 걸릴일이지 해야했던 일이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겁니다 서구열강들이 근대화를 50년 100년 200년에 걸쳐 하나씩 변하기위해 무던한 사회적인 충돌과 위기를 겪으며 했던걸 조선은 단시간에 해야했는데 조선의 사상적 토대나 사회풍조, 세력등이 그 속도를 못따라간거죠 못따라간거지 못하거나 반대한게 아닌거죠. 일본이 근대화시키지 않았으면 못했을거다 라는 바탕이 아닌이상. 우리도 간섭이 없었다면 어차피 그쪽길로 가던참이었습니다. 역사가요. 1860~1910년 사이에, 하루가 멀다하고 외세의 간섭과 경제침탈 특히 일본과 청나라의 흔들기가 없었다면 우리도 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먹히지만 않았다면 느리게라도 우린 했습니다. 이나라 역사가 그래요.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봤을때, 어차피 근대화로 가던길이었고 아무리 좋은 도움이라도 그게 강제로 당하면서 "고맙다" 라고 말할 모지리는 없습니다. 대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네요. 주저리주저리 떠들것없이 그냥 " 강제성 " 이거 하나면 사실 다 의미가 없는거잖아요. 유치원생들도 알만한 부분이거늘

  • @user-pg1mp3xl5y

    @user-pg1mp3xl5y

    2 ай бұрын

    제말이 이말입니다. 여기 댓글들 진짜실화인지 어찌 이영상을보고 감탄을하며 아이들 교육에쓴다하는지... 당연히 그시대 조선인은 반항을 "감히" 할수없었으며 수긍하고 살수밖에.. 일본인들이 필요로하는 다수의 쌀들을 조선인들이 농사하여 그들 배를 불려줬는데 일할기회를얻어 돈을벌게 해줬으니 좋은거다? 진취적인삶이다?아이고.. 이사람 진짜 위험한사람입니다 철도도 자기들 쌀과 물품들 수탈 용도로 대한민국 궁이며 유산들 아무렇지않게 다 부수고 철도새웠는데... 뭘알고얘기하는건지 모르겠네요

  • @user-pg1mp3xl5y

    @user-pg1mp3xl5y

    2 ай бұрын

    일본이 원하는게 그거였어요 힘없는 조선왕보다 자신들이 더 돈 잘벌게해주고 나라좋게해주니 식민지통치는 좋은거다 인식새워서 반감없이 조선을 통치하는것. 근데 대만과 달리 우리나라는 그게 안되서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이 나왔던거고.

  • @vorstellung3861

    @vorstellung3861

    2 ай бұрын

    무슨 헛소리냐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아래에서 근대화를 못했다면 스스로 했을 거라고? 그럼 중국이나 러시아가 옆동네에 귀찮은 상대가 생길 때까지 보고 있을 거라는 얘기냐?ㅋㅋㅋㅋ 너 위안스카이가 조선 들어와서 고종이 세우던 공장 다 갖다부수고 서구 유학생 엘리트들 잡아죽이던 거 모르지?ㅋㅋㅋㅋㅋ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2 ай бұрын

    일제시대 우리가 발전한 것과해방후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을 비교해보면 독자적으로 움직일때 휠씬 발전했다고 하면 해방 후 발전은 일제가 밑거름을 깔아줬기 때문이래. 일제가 무슨 밑거름을 깔아줬냐고 물으면 또 다시 조선시대랑 비교함. 무슨 도돌이표입니까? 문명이 전파되는 것은 물컵에 잉크를 떨어뜨리는것과 같아요. 자연스럽게 퍼지게 되어있어요. 일본이 아니었어도 한국은 근대화를 이룩하게 되어있어요. 애초에 일본의 근대화도 서양에서 배워 온거지 산업화가 일본에서 생겨난겁니까? 해방후 우리는 기술도 자본도 인프라도 없는 상태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구어냈어요. 이로 미루어보면 일본이 없이 36년을 보냈어도 우리는 근대화를 해냈을거라고 자연스레 추정할 수 있는겁니다. 오히려 더 잘해냈을겁니다. 박정희가 미국의 경공업위주로 경제발전시키라는 압력을 물리치고 중공업 위주로 산업을 육성했죠.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였다면 알짤없이 경공업 위주로 산업을 육성시켰고 지금의 발전은 이루지 못 했을겁니다. 이를 대입해보면 일본이 던져주는건만 먹어야하는 식민지에 비해 나라가 독립된 상태였다면 우리에게 필요한걸 찾아서 먹었을거라는걸 알수있죠. 이는 무려 36년간이나 같은 정부의 통치를 받았음에도 일본은 항모와 전투기를 생산하고 우리는 자전거 한대 제대로 못만들었다는데서 드러납니다. 36년 세월에 비해 기술격차가 너무 하잖아요.

  • @jaehyunchoi3556

    @jaehyunchoi3556

    2 ай бұрын

    일본이 잘했다 좋은 일 한 거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요;

  • @user-uq2uz7dt6c
    @user-uq2uz7dt6c Жыл бұрын

    일제의 어두운 면도 분명 존재했겠지만, 당시 일제시대에 사셨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 중에는 당시 친하게 지낸 일본 이웃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간간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일제를 드라마와 역사교과서로 배워와서 일본얘기만 하면 분노하고 그게 애국인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입장만이 정답일까?란 생각에 직접 그 당시 자료들을 찾아보니 제가 배운 것과는 다르더군요.. 근데 이러한 사실들을 주변에 암만 얘기해줘도 되려, 그런 얘기하지마라 일제 만행을 옹호하려는거냐? 너가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니 근거가 진정 맞다고 생각하냐? 한국사에서는 그렇게 안나오던데? 라는 반응이더라구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의구심을 갖지 않는 이상 반일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 @user-tm3ti4kp9l
    @user-tm3ti4kp9l8 ай бұрын

    인간취급도 못받고, 양반한테 수탈이나 당하던 일반 농민들이 일제시대가 싫었을까? ㅋㅋㅋㅋ 사람취급받고 살기시작시대가 아닐까 하는데

  • @user-wp7zb6lg5l

    @user-wp7zb6lg5l

    8 ай бұрын

    우선 문맹률 80% 신분제 유지 독립운동가 양반 출신이 지방출신

  • @호시니

    @호시니

    Ай бұрын

    ㄹㅇ 노예 해방시켜준 해방군이지 ㅋㅋ 임진왜란에도 노비들이 제일먼저 궁에 불지른 이유가 노비문서 불태우러 간거임😂

  • @jejeblueangel8120

    @jejeblueangel8120

    8 күн бұрын

    일반 농민이 왜 양반한테 수탈을 당하냐? 그때도 돈으로 양반샀다. 조선말에 이미 70%가 양반. 그럼 좋았겠냐?

  • @user-tm3ti4kp9l

    @user-tm3ti4kp9l

    8 күн бұрын

    @@jejeblueangel8120 조선말, 이 나라의 농민들은 최소한의 노동을 하면 더이상 일을 하지 않고 저작거리에서 모여 담배만 피거나 노름을 하기 일수였다. 일을 더해봐야 얻는 것들은 모두 수탈당했기 때문이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대가리 나쁘면 댓글달지 말자. 말 섞어줄게 이번까진.

  • @user-tl9oe5ex9l

    @user-tl9oe5ex9l

    8 күн бұрын

    @@user-tm3ti4kp9l이러니 저러니 해도 조선은 개판이였어

  • @user-qy4ts7nu6n
    @user-qy4ts7nu6n2 ай бұрын

    진짜 과거와 현재가 다른점이 없다는게 소름 돋는 중임

  • @KimGapHwan
    @KimGapHwan8 ай бұрын

    3:10 지주에게 주나 일본에게 주나 소작농 입장에서는 똑같은거 아닌가요?? 그래서 일본에게 뺏겨도 농사 지을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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